왕들이 꿈꾸던 세상은 현실에 막히고… 배우 이병헌, ‘광해’ 그 슬픔을 말하다

입력 2012-09-05 18:08


임금 흉내를 내며 세상을 조롱하는 광대, 가짜 왕 노릇을 하며 조금씩 진짜 임금이 돼 가는 하선, 서자 출신인 자신을 해하려는 무리들의 위협 속에서 점점 판단력을 잃어가는 광해군. 19일 개봉되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주인공 이병헌(42)이 극 중에서 연기하는 세 가지 캐릭터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병헌은 각기 다른 성격의 인물을 성공적으로 소화해냈다.

4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어제 공식 시사회 때 너무 긴장되고 떨렸는데 많은 분들이 ‘영화 좋더라’고 격려해 조금은 안심이 됐다”고 첫 사극 출연에 대한 부담감과 소감을 밝혔다. 독살 위기에 놓인 광해군을 대신해 천민 출신의 광대 하선이 가짜 왕 노릇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서 이병헌은 광해와 하선, 1인2역을 맡았다.

‘내 마음의 풍금’(1999) ‘공동경비구역 JSA’(2000) ‘번지 점프를 하다’(2000) ‘달콤한 인생’(2005)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악마를 보았다’(2010)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순수한 이미지와 강렬한 캐릭터를 오간 그였지만 사극은 쉽지 않았다. “그동안 장르 영화, 그것도 너무 센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 인간적이면서도 폭군인 왕을 연기하는데 애를 먹었어요.”

전국 각지를 돌며 촬영하는 강행군 중에서도 그가 가장 힘들어한 부분은 “영화를 순서대로 찍지 않고 뒤죽박죽 촬영해서 그 변해가는 ‘선’을 맞추는 것”이었다고. “하선과 광해 역할도 왔다 갔다 하면서 찍어 감정의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어려웠어요. 하지만 곤룡포가 익숙해지면서 나중엔 내가 진짜 왕이 된 기분이 드는 거예요. 이런 감정을 살려 연기했어요.”

‘마파도’(2005) ‘사랑을 놓치다’(2006) ‘그대를 사랑합니다’(2010) 등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추창민 감독은 이번 작품 전반부에 특유의 코미디를 삽입했다. 평소 굶주린 하선이 왕으로 변신한 후 음식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도승지 허균(류승룡)의 이런저런 간섭에 “사는 게 다 그런 건데 뭘 그러시오”하고 눙치는 장면 등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병헌은 “코믹 요소를 어느 수준까지 맞출 것인가는 감독뿐 아니라 나에게도 숙제였다. 너무 오버하면 유치해지기 때문에 세련되게 하자고 했는데 관객들이 어떻게 볼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대신들 가운데 장관 출신의 김명곤 선배 등 쟁쟁한 배우들이 많은데 ‘왕 역할을 하고 나면 연기에 새롭게 눈 뜨게 될 것’이라고 조언해줘 용기를 얻었다”고 덧붙였다.

이병헌이 연기한 광해가 유머와 위엄을 지닌 임금이라는 면에서 명품 사극 ‘뿌리 깊은 나무’에서 한석규가 맡은 세종의 캐릭터와 통한다. 이에 대해 이병헌은 “세종이 ‘우라질’ 등 욕을 하고 백성들을 끔찍이 아낀다는 점에서는 광해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세종이 하는 것은 ‘왕의 농담’이고, 광해의 말은 ‘백성의 일상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광해군 8년 2월 28일, ‘숨겨야 할 일들은 조보(朝報·관보)에 내지 말라’는 구절에서 힌트를 얻었다. 실록에서 영원히 사라진 15일간의 행적을 상상력으로 채웠다. 영화의 주제를 묻는 질문에 이병헌은 “왕이 된 천민이 바라는 세상, 누구나 임금이 된다면 꿈꾸는 세상,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슬픈 드라마”라고 답했다.

연인 이민정에 대해서는 “나를 웃게 만들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며 “‘광해’ 촬영장에 식이요법 중인 나를 위해 맞춤형 도시락을 준비해온 걸 보고 감동받았다”고 소개했다. 이병헌은 할리우드 영화 ‘레드 2’ 촬영을 위해 10일 출국한다. 개봉 때 팬들과 함께 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그는 “어마어마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니 꼭 보러 오시라”고 홍보했다. 15세 관람가.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