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오바마와 ‘지루한 백인’

입력 2012-09-04 18:39

지난달 밋 롬니 미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백인인 폴 라이언 하원 예산위원장을 선택했을 때다. 공화당 지지자로 자신도 백인인 미국인 지인은 “또 ‘지루한 백인(boring white guy)’이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에서 백인들은 화끈하게 놀 줄 모르고 조금 경직되고 따분한 이들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지루한 백인’이라는 말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관용어처럼 쓰인다고 한다.

지인의 말에는 롬니가 자신과 오십보백보인 ‘보수층 백인 남성’을 선택해 중요한 ‘옵션’을 허비했다는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 공화당이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히스패닉이나 흑인, 여성 등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해 지지 기반을 넓혀야 했었다는 것이다.

지난주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를 취재하면서 지인이 토로한 안타까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주인공인 롬니가 그렇다. 지난달 30일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그는 64년을 해로한 부모의 사랑, 고교 때 만난 앤 롬니와의 결혼 등을 언급하며 ‘인간 롬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기자가 받은 인상은 ‘인간적인 매력이 2% 부족한 부유층 백인’ 정도였다. 연설에서 폭발적인 열정이나 힘이 없었던 것이 부유층 자제로 태어나 굴곡 없었던 삶과 관련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샛별’로 불리는 라이언 부통령 후보에게는 현실에 발붙인 정치인보다는 이데올로그로서의 과격함이 느껴졌다. 42세라는 젊은 나이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사안을 단순화하고 지나치게 자신이 넘친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극한 스포츠를 즐길 정도로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유명한 그를 가슴 터놓고 재미있는 얘기를 할 대상으로 여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분명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 부분에서 강점이 있다. 지난달 15일 유세연설 뒤 아이오와주 박람회에 들른 오바마 대통령은 주민들에게 맥주를 샀다. 주민들과 맥주를 나누며 자신의 맥주 사랑을 털어놨다. 오바마의 연설에는 농구 야구 미식축구 등 스포츠 이야기도 곧잘 등장한다. 오바마가 광적인 농구팬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1일 아이오와주 어번데일에서 유세할 때는 “오늘 대학 미식축구 시합 중계방송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방송을 볼 수 있도록 연설 마칠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큰 박수가 쏟아진 것은 물론이다.

‘정치 고단수’인 오바마가 유권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의식적으로 이런 얘기를 한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농구 미식축구 등은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다. 지난 7월 중순 부인 미셸, 딸 사샤와 워싱턴DC 버라이즌 센터 농구 경기장을 찾았다가 ‘키스 카메라’에 잡혀 미국인들에게 단란한 가정임을 보여준 것도 미국인들과의 소통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미국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정서를 훨씬 잘 이해하고 있는 이가 오바마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바마의 흡인력을 너무 잘 알기에 공화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자인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가슴이 아니라 이성으로 투표하자고 연설한 모양이다.

오바마의 국정운영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릴 수 있겠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정서와 심리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게 정치인의 기본 자질이라면 오바마가 이를 갖췄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