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폴리테이너 시대’… 정치인들 “미디어 쇼로 유권자 사로잡아라”

입력 2012-09-04 17:54


정치인의 미덕은 무엇일까.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를 말하고 시오노 나나미는 지적능력·설득력·지구력·인내력·의지를 들지만, 미디어 전쟁을 치러내는 현대의 대선 주자들에겐 ‘예능 감각’이 추가된 듯싶다.

◇예능하는 정치인 폴리테이너=‘폴리테이너’라는 용어는 좁게는 연예인 출신의 정치인을, 넓게는 예능프로그램 등 엔터테인먼트 쇼를 선거에 이용하는 정치인까지를 정의하는 말이다. 한국에선 한때 사회 이슈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연예인을 비꼬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정치인의 토크쇼 출연이 늘면서 정계에서 토크쇼가 차지하는 위상도 덩달아 높아졌다.

미국에선 존 F 케네디가 처음으로 뉴스 아닌 TV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는 당시 인기 토크쇼인 ‘투나잇 쇼’와 ‘퍼슨 투 퍼슨’에 출연, 특유의 재치있는 말솜씨로 좌중을 휘어잡았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대선 후보들이 종종 시사토크쇼에 나왔다.

그러나 폴리테이너의 효시로는 빌 클린턴을 드는 게 일반적이다. 1992년 6월 ‘아세니오 홀 쇼’에 출연한 클린턴은 복잡한 정치 이야기 대신 색소폰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연주했다. 이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Stupid, It's the economy)’라는 슬로건만큼이나 효과적인 선거운동이었다. 진 트윈지 샌디에이고주립대 교수는 이를 두고 “클린턴의 아세니오 홀 쇼 출연은 미국의 선거문화 자체를 바꾼 사건”이라고 평했다.

2000년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도 클린턴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들은 ‘데이비드 레터맨 쇼’ ‘오프라 윈프리 쇼’ 등에 경쟁적으로 출연하며 가족 이야기와 연애담 등 개인사를 털어놓았다. 특히 부시는 ‘라이브 위드 레지스 앤 켈리’에서 감춰 있던 유머 감각을 과시, 호평 받은 경우다.

유연하면서도 능숙한 미디어 활용으로 유명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예능 출연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연설 한번으로 청중을 ‘훅 가게’ 만드는 달변가이면서, 불쑥 채팅을 한다든가 트위터리언들에게 직접 답변을 보낸다든가 하는 쇼맨십도 보인다. 시민에게서 온 편지에 직접 답장을 쓰기도 한다.

그는 선거 이후까지 이어지는 ‘예능 정치’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토크쇼에 출연해 웃음을 쏟아내던 거물급 정치인들이 선거 종료와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던 전례를 오바마는 따르지 않았다. 그는 취임 이후에도 종종 데이비드 레터맨 쇼, 오프라 윈프리 쇼 등을 찾아 백악관에서의 일상을 털어놓거나 직접 정책 홍보를 했다. 지역 소규모 방송국과의 인터뷰에 응하는 일도 잦다. 그래서인지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진 뒤에도 호감도(likability)는 늘 높은 편이다.

반면 유력 신문과 인터뷰를 한다든가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 방식의 ‘전통적인’ 소통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말을 듣는다. 최근에는 백악관 기자실로 불쑥 찾아와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홀연 떠난 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폴리테인먼트’의 저자 데이비드 슐츠 햄라인대 교수는 제한된 시간 안에 보다 많은 유권자들의 이목을 끌어야 하는 정치인들이 TV 토크쇼 등을 선택한다고 본다. 사람들이 점점 신문이나 뉴스 등의 전통적 미디어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오락적 영상매체의 영향력은 증가하고 있다. 정보가 아니라 이미지에 투표하는 경향은 젊은층과 유색인종에게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슐츠 교수는 “폴리테인먼트는 현시대 정치의 본질”이라며 “이제는 정치인들이 (엔터테인먼트적 의미에서) 셀러브리티가 되려고 한다”고 밝혔다.

◇폴리테이너가 되기 위한 조건=한국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96년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한 게 최초다. 이후 노무현·이명박 대통령도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최근에는 SBS ‘힐링캠프’에 유력 대선 주자들이 잇따라 출연하며 지지율 상승효과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호감 가는 언변과 TV 화면에 적합한 외모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훌륭한 인격과 해박한 지식을 갖췄더라도 어눌한 말투에 못난 얼굴을 하고 있어서야 정치인을 직업으로 삼긴 힘든 시대가 되었다.

옷차림도 중요하다. 건국대 의류학과 김주현씨는 지난 2월 ‘외모 요인이 대통령 후보의 이미지 평가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정치인이 남색과 빨간색의 넥타이를 맬 경우 파란색 넥타이보다 훨씬 능력있고 세련돼 보인다는 사실을 밝혔다.

여성의 경우는 좀 더 까다롭다. 품위와 패션 감각을 과시해야 하지만 비싼 옷을 입으면 역효과가 난다. 2008년 10월 ‘투나잇 쇼’에서 중저가 브랜드인 제이크루 의상을 명품처럼 소화한 미셸 오바마는 호평을 받았지만, 같은 시기 공화당 부통령 후보 세라 페일린은 의류 구입비로 15만 달러를 썼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곤욕을 치렀다. 2007년 빚어졌던 김윤옥 여사의 에르메스 핸드백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