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샘] 자기 자리 찾는 계절
입력 2012-09-03 18:37
稻花風際白
豆莢雨餘靑
物物得其所
我歌溪上亭
벼꽃은 바람 불어 하얗고
콩꼬투리는 비온 뒤에 푸르다
사물마다 제 자리를 얻었으니
나 시냇가 정자에서 노래하네
양이시(楊以時 : ?∼1377) 제평릉역정(題平陵驛亭) ‘東文選’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톡톡 털어낸 참깨는 고소하고 오미자는 신맛을 단맛으로 바꾸고 있다. 하늘도 희로애락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빛깔을 찾아가고, 여울물 소리도 사뭇 알이 배어 가슴을 울린다. 가을은 과연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기에 좋은 계절이다.
벼는 바람이 가루받이를 해주고 콩은 비가 그것을 해준다. 벼가 이삭이 패려고 알이 배는 때를 ‘배동받이’라고 하고 꽃이 피어 수정하는 것을 ‘자매기 받는다’고 한다. 이 시기는 벼의 성장이 왕성해 바람결에 일렁이는 모습이 마음을 풍성하게 한다. 콩은 꽃이 필 때 가물면 꼬투리가 별로 생기지 않는다. 빗물이 흘러내리며 수정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 시의 앞 2연에서 노래한 것은 바로 그러한 농사 지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제 자리를 얻는다(得其所)는 말은 자신의 능력과 성품에 꼭 맞는 자리와 위치를 얻는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생물, 무생물에도 쓰인다. 춘추시대 정(鄭)나라는 소국이었는데 자산(子産)이라는 명재상이 외교에 능하여 나라를 잘 이끌어 갔다. 하루는 선물로 받은 물고기를 하인에게 주면서 연못에 기르라고 하였는데, 하인이 그 물고기를 삶아 먹고 와서 연못에 풀어준 물고기가 잘 놀더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에 자산이 “그 물고기가 제 자리를 얻었구나(得其所哉)”라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에 동양의 선현들은 환과고독에 놓인 사람이나 소경 등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특별히 따뜻이 대하고, 모두 자기 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음을 놓지 않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사서삼경의 본문과 주석 곳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오곡백과가 제 모습과 빛깔을 드러내듯이 사람도 모두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자연의 은혜에 보답하는 도리가 아닐까.
김종태(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