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영 (2) “해영,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 삼지 않을래요?”

입력 2012-09-03 18:24


영결식이 끝났다. 아직 쌀쌀한 3월 중순, 빗줄기 너머로 큰아버지가 제사상의 음식을 건넸다.

“해영아, 이리 와서 너거 아부지가 마지막으로 주는 거 같이 묵자.”

빗물이 내 얼굴을 때렸다. 아무도 몰랐지만 난 울고 있었다. 울음을 삼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절대 안 울 거야. 내가 왜 울어.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니야. 이것은 잘못된 거야.’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한 달 만에 아버지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엄마와 5남매를 서울에 덩그러니 남겨둔 채 스스로 생을 마쳤다. 유서 한 장 없는 아버지의 삶은 유산 7만2000원이 전부였다. 그간 엄마는 우울증이 도질 때마다 아버지와 싸웠고 집안은 엉망이 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5년 이상 반복된 우리 집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부모님은 영원히 다시 싸우지 않아도 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 눔의 가시나, 아주 나가 죽어라. 니가 너거 아부지 잡아묵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 잘못이 하나 더 추가됐다. 여자로 태어나 장애인이 돼 엄마의 정신병을 악화시켰다는 죄(?) 외에 아버지를 죽게 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매질과 학대를 당하면서도 삭혔던 내 불만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출로 이어졌다. 장례식이 끝나고 6개월여가 지난 어느 날,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달려오는 엄마를 피해 집을 나왔다. 엄마 얼굴을 보지 않아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만 14세. 초졸, 장애인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힘들게 찾은 것이 월급 3만원 식모, 내 첫 직업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시작했다. 40대 이하는 잘 모르겠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10대 소녀들이 집 여주인의 육아와 가사를 돕는 식모살이를 많이 했다. 요즘의 ‘입주 가사도우미’인 셈이다. 그렇지만 그 일은 내게 너무 힘들었다. 무엇보다 희망이 없다는 데 좌절했다. 특히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처지가 너무 아팠다.

‘무료 직업훈련생 모집, 양재, 편물, 자수, 미용. 6개월 과정….’ 식모를 하면서 우연히 본 반상회보에 눈이 번쩍 뜨였다. 당시 한남동 서울중부기술교육원은 영세한 서울시민들에게 무료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조심스럽게 내 처지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교육원에 보냈다.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도왔다.

6개월의 짧은 과정이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먼저 기계편물 3급 자격증을 땄다. 이는 편물기계와 털실로 스웨터 한 벌을 만들 수 있는 기초기술을 갖췄다는 뜻이다. 또 편물기술을 가르쳐주며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승으로서 힘이 돼주시는 멘토를 이곳에서 만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나를 있게 한 운명적인 말을 최영숙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이 말은 그 이전까지의 나와 그때 이후의 나를 갈라놓았다.

“해영이가 이 세상을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아야 할 텐데. 교회를 안 간다고 하니 내 마음이 아프다.”

기숙사 사감이던 최 선생님은 일요일마다 원생들과 함께 교회에 갔다. 하지만 몸도 아프고, 무엇보다 강요하는 듯한 태도가 싫었던 나는 오히려 번번이 따져 물었다. 이 같은 내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를 염려해 주는 말, 그것도 살아갈 날을 걱정해 주는 말을 나는 이때 처음 들었다. 볼품없고 초라한 내게 최 선생님은 예수를 알게 한 것이다. 입학 당시 종교란에 ‘자신교’라고 적었을 만큼 나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완악한 내 마음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최 선생님의 예수 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에 녹아버렸다.

‘아, 저분의 마음은 진실하다. 나를 장애인으로 대하지 않고 친구가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는구나.’ 감동이 밀려왔다. 그분이 믿어보라고 하는 예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믿어볼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 친구가 되어 준다는 예수가 나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보다는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어느새 나는 기독교인이 되고 있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