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같은 가족, 그 소중함 깨닫게 하는 ‘힐링연극’… 손숙 모노드라마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입력 2012-09-02 18:26
작가 박완서(1931∼2011)와 배우 손숙(68). 한국을 대표하는 두 여성 예술가가 만났다.
연극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박완서 사후 1주기를 맞은 추모 공연으로 기획됐다. ‘생때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태산 같은 설움을 억누르며 살았다’는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박완서는 1988년 한 해에 남편과 서울대 의대 인턴이던 아들(당시 26세)을 연이어 잃었다. 큰 충격으로 1년 정도 붓을 꺾었다. 그리고 1993년, 응어리진 슬픔을 1980년대 시대상황과 함께 담아 내놓은 것이 이 소설이다. 제목은 김현승 시인의 시 ‘눈물’에 나오는 문구로 ‘내가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박완서의 소설이 관록의 배우 손숙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손숙은 70분 동안 혼자 무대를 책임진다. 극적인 무대 장치도 배우의 큰 움직임도 없다. 오로지 대사와 표정만으로 공연 내내 관객의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 많은 대사를 외우는 것만도 신기한데 혼자 감정의 강약을 조절하며 마지막에는 관객의 눈물까지 끌어낸다. 가능한 울음을 자제하려는 연기가 돋보인다.
연극은 윗동서 형님과의 전화 통화 형식으로 진행된다. 먹고 살 만큼의 연금을 남겨 준 남편 덕에 생계 걱정이 없고, 제 앞가림하는 두 딸도 두었지만 주인공은 늘 마음이 헛헛하다. 아들에 대한 처절한 그리움 때문이다. 아들을 잃은 후 전에는 소중했던 것들이 더 이상 소중하지 않게 됐다. 물건을 사 모으기보다는 버릴 게 없나 찾는다. 생때같은 목숨도 쉽게 없어지는 마당에 물건의 목숨은 왜 그렇게 질긴지 야속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식물인간이 된 아들을 돌보며 사는 동창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견딜 수 없는 질투를 느낀다.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물이나 출세나 건강이나 그런 것 말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항상 곁에 있어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족의 존재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하는 ‘힐링 연극’이다.
연출을 맡은 유승희씨는 “박완서의 원작에 가능한 충실하려고 애썼다”며 “연극적인 장치도 거의 안 썼다”고 말했다. 그런 만큼 배우의 부담이 컸다. 손숙은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여름 두 달 동안 이 연극에만 매달렸다. 넓은 연습실에 덩그러니 앉아 연습하면서 벽 같은 것을 느꼈고,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이번이 네 번째 모노드라마인데 가장 힘들었다. 그는 “대단한 작품이라 덥석 물긴 했는데 박완서 선생이 쓴 주옥같은 대사를 말로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 연극에는 반복되는 대사가 있다. “우리가 참 모진 세상도 살아냈다 싶어요. 그나저나 그 모진 세상을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모두에게 위안이 될 작품이다. 9월 23일까지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02-3272-2334).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