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찬희] 머니볼
입력 2012-09-02 18:35
팀은 만신창이였다. 1989년 우승 이후 최하위권을 전전했다. 열악한 재정 때문에 실력 있는 선수는 다른 구단에 팔았다. 가난한 구단, 오합지졸 구단. 1990년대 미국 프로야구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모습이었다.
현대 프로스포츠는 돈으로 승리를 산다. 좋은 성적을 내려면 좋은 선수가 필요한데 그럴러면 더 많은 돈을 써야 한다. 특히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는 구단의 빈부격차가 심하다. 돈이 승부를 지배하는 ‘머니볼(money ball)’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곳이다.
하지만 1998년 빌리 빈이 오클랜드의 단장을 맡으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빌리 빈은 각 선수의 역량을 보여주는 데이터, 승리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치에 주목했다. 다른 구단에서는 쳐다보지도 않는 선수들을 헐값에 영입하고, 자신의 가치를 펼쳐 보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변화는 기적으로 연결됐다. 오클랜드는 2000년부터 4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2002년에는 선수 전체 연봉이 4000만 달러에 불과한 팀이 1억2500만 달러의 뉴욕 양키스와 나란히 메이저리그 최다승을 기록했다.
기업의 세계에서도 ‘머니볼’은 힘이 세다. 돈은 시장 지배력으로 직결된다.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는 삼성과 애플의 소송전쟁은 여러모로 ‘머니볼’을 떠올리게 만든다.
두 기업은 한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IT 기업이다. 그러나 출생과 성장 과정은 전혀 다르다. 애플은 전형적 벤처기업이다. 기술과 아이디어를 무기로 ‘머니볼’이라 부를 수 있는 기존 체제에 끝없이 도전하며 지금의 애플이 됐다. 반면 삼성은 재벌그룹이다. 막강한 자금력, 빠른 의사결정, 전폭적인 정부의 지원을 무기로 경쟁자를 따돌리며 커 왔다.
둘의 차이는 그대로 한국과 미국 산업생태계의 차이다. 산업생태계는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는 ‘초식동물’ 벤처기업이 활발하게 태어나고 자라야 건강하다. 초식동물이 사라지면 생태계는 붕괴한다. 기술 혁신과 시장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미국의 산업생태계는 애플이라는 걸작을 키워낸 데 비해 우리는 ‘육식동물만의 세상’이다. 맹수들은 돈으로 벤처기업의 신기술, 특허, 아이디어는 물론 새로 열린 시장 자체를 사들이며 몸집을 불리고 있다.
빌리 빈이 이끄는 어슬레틱스의 눈부신 활약은 수많은 ‘카피캣(모방)’을 낳았다. 변화와 혁신에 갈채가 쏟아졌다. 우리 산업계에서도 ‘머니볼’이라는 장벽을 돌파할 한국판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김찬희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