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영 (1) ‘쓸데없이 태어난 가시나’ 134㎝ 작은거인이 되다

입력 2012-09-02 17:42


작은 거인. 134㎝인 내 키를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이 별칭이 마음에 든다. 이 키로도 훨씬 키 큰 사람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강점으로 만들어 살기 때문이다. 초졸 장애인에 월급 3만원 식모였던 내가 국제장애인기능대회 금메달, 보츠와나 봉사 14년, 컬럼비아대학원 석사를 거쳐 현재 국제사회복지사로 아프리카를 주 활동무대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의 기쁨과 감동은 항상 고통과 고독이라는 역경을 견디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찾아왔다.

“이 놈의 가시나, 쓸데없이 태어나서 내가 이 고생이야.”

“누가 낳아달라고 했어.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 엄마가 낳았잖아.”

“이 가시나가 어데 말대꾸고. 저리 안 나가나. 저 빙신 같은 것이….”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달려든다. 나는 약이 올랐다. 안 맞으려고 집을 뛰쳐나와 문밖에서 엄마에게 또 대들었다.

“병신된 게 내 잘못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말은 엄마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았다.

“이 가시나가….”

이 때쯤이면 엄마는 앞뒤가 안 보인다. 멀리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집을 나와 동네를 빙빙 돈다. 밤이 깊었지만 돌아갈 수 없다. 아버지라도 들어와야 식구들이 잠든 틈에 몰래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다.

경북 상주 산골에서 살다 1970년 초 서울로 온 우리 가족은 지독한 가난해 시달렸다. 생계가 곤란할 정도였다. 고된 시집살이로 우울증을 앓던 엄마는 매일 지겹도록 아버지와 싸웠다.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 아버지가 외출하면 2남3녀의 맏이인 내게 엄마의 화살이 집중됐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조절 못한 탓에 이유 없이 날 때렸고 온 몸은 멍투성이가 됐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동생 네 명의 치다꺼리나 아버지의 술심부름 등을 하면서 집안일을 시작했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학교도 겨우 다녔다. 결석도 잦았다.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육성회비를 내는 날은 아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매질은 계속됐다. 키가 작고 등이 좀 굽은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어린 내 마음에는 억울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장애를 가진 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인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단 말이야!”

스스로에게 아무리 말해도 가족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해 오는 듯했다.

“얘, 키가 작고 몸이 불편한 것은 네 잘못이야, 더 생각할 것도 없어!”

그러던 어느 날, 키가 작게 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희 아버지 미워하지 마라. 네가 태어나고 며칠 후에 친척들이 미역을 사갔는데, 엄마를 미워하던 너희 할아버지가 ‘딸인데 쓸데없이 돈을 쓴다’고 해서 모두 혼났다. 그때 네 아버지가 술을 먹고 왔는데, 홧김에 밀쳐낸다고 한 것이 너를 던진 꼴이 됐다. 이 때문에 네가 몸이 그리 되었지만, 그래도 네 아버지다.”

초등학교 5학년 때서야 고모로부터 장애의 원인을 알게 됐다. 고모의 걱정과는 달리 난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난 것과 장애인이 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데 안심했다. 그리고 엄마가 무수히 던진 그 저주의 말들이 오히려 잘못된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약력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79년 입주 식모 시작 △80년 서울 한남직업전문학교 졸업 △83∼84년 전국장애인기능대회 기계편물 금메달 △85년 세계장애인기능대회 기계편물 금메달·철탑산업훈장 수상 △90년 보츠와나 선교사로 파송 △2008년 미국 나약대학교 졸업 △2010년 미국 컬럼비아대 사회복지대학원 석사 △현 밀알복지재단 희망사업본부장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