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5)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입력 2012-09-02 17:38


“예수님을 위해 모든 사람 사랑하고 당신 자신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라”

라인강은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로 흐른다. 멀리 북해가 보이는 네덜란드의 끝자락에서 또 한 사람의 영성가가 나왔다.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이다. 그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어거스틴의 ‘참회록’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 서적 가운데 단연 최고봉이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 주 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더위를 피하여 모처럼 기도원에 올랐다. 그때 손에 들려진 책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였다. 평소 다독과 속독을 즐기는 편이지만 이 책만은 정독하리라 다짐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 그리스도를 본받아’, 일기 형식의 영성고전

우선 이 책이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일기 형태로 된 영성의 고전이 얼마나 많은가.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드, 조지 휫필드, 존 울만 그리고 토머스 머튼 등이 이 범주의 책을 남긴 인물들이다.

일기는 매일 매일의 삶을 진솔하게 토해내는 영혼의 독백이다. 미뤘다가 한꺼번에 쓰지 않기 때문에 신선하고, 매일 쓰기 때문에 진솔하다. 모톤 켈시가 ‘내면세계로의 여행’에서 강조한 대로 ‘일기(특히 영적 일기)는 우리 내면의 영적 여행의 외적·가시적인 표지판’이다.

갈급한 마음으로 책장을 열자 살아 있는 언어가 펄떡거리며 가슴에 들어왔다.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 자신을 위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에 대하여 이토록 간명하게 말할 수 있는가. 쉽다는 것은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이 한마디를 위해 켐피스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묵상했을까. 그렇다. 예수님은 나와 모든 사람의 중심이다. 또 하나의 문장이 나를 잠시 머물게 했다.

“길이 없으면 진보가 없으며, 진리가 없으면 지식이 있을 수 없고, 생명이 없이는 삶이 있을 수 없느니라.”

켐피스의 평생 기도가 이 한마디에 녹아 있는 것 같다.

회개가 영적 묵상의 시작

켐피스는 이어 회개함으로써 자신의 영적 묵상을 시작한다.

“나는 삼위일체의 정의에 관하여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켐피스는 회개의 정의를 아는 것보다는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것은 사변적인 중세 스콜라신학이 가져다 준 폐해 때문이리라. 그렇다. 회개에 대하여 아는 것보다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회개 없이는 어떤 성장도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회개는 곧 자기부정과 겸손으로 이어진다. “너희 자신이 경건하다는 생각에 너무 열렬히 집착하지 말라. 그러한 경건함이 바로 다음 순간에는 그와 정반대의 것으로 쉽사리 변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가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이러한 은혜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비참하고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라.”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주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 주님! 그러므로 당신께서 만일 당신의 손을 우리에게서 거두신다면 우리에게는 진실로 거룩함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만일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당신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용기는 도움이 되지 못하며, 당신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순결성은 지켜지지 못하나이다. 당신의 거룩하신 돌보심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한다면 우리 자신을 돌보고자 하는 조심성이란 아무 소용이 없나이다.”

이것을 진부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문장이 길지만 사실이다. 경험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자신의 죄성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과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완전하기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의 결점은 사실상 고치려 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결점은 고쳐지기를 바라며 엄하게 다루면서도, 우리 자신은 고치려 하지 않고 남에게 간섭받기조차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마구 자유를 누리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남의 죄만 보이는 것. 그때 우리는 먼저 침묵해야 한다.

“기꺼이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사람만이 외부로 나가 대중들 앞에서도 안전하고 자신감 있게 되는 것입니다(전3:7).”

침묵은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을 고치기 위하여 매우 좋은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악에 빠지기 쉬운 성향과 더불어 싸워서 그것에 지지 않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은혜와 미덕이 필요할 때에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은 곧 자기와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 진지해야 영적으로 승리한다.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는 법

영적 생활에 있어서 항상 조심할 것은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보이는 현상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행동을 인정받거나 칭찬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일이고 무익한 일이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순수하고 맑은 양심을 가진 사람은 어디서나 쉽게 만족과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당신이 거룩한 사람은 아니며, 또한 사람들의 책망을 받는다고 해서 당신이 사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일 뿐이며, 하나님 앞에서 말에 의하여 더 위대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증거도 요구하지 않았다(요2:24∼25). 하나님의 사람이 늘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 행동이 삶의 표준이 되거나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의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일 뿐이다.

영적 생활은 고통 없는 삶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적 생활이 고통 없는 삶은 아니다. 고통 없는 삶이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지금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참 평화인 줄 생각하지 말라. 또한 아무도 나를 반대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만하다고 생각하지 말며, 모든 일이 네가 원하는 대로 되어간다고 해서 만사가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영적인 생활이란, 잔잔한 바다가 아니라 풍랑 치는 바다에서 베드로가 한 것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켐피스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주님 안에 영원히 거하고 싶은 열망이다.

“내가 간구 하옵나니 저로 하여금 온전히 당신과 연합하게 하사, 모든 피조물로부터 제 마음이 멀어지게 하시고, 거룩한 성찬식에 자주 참여함으로써 하늘에 속한 영원한 신비를 점점 더 많이 맛볼 수 있게 하소서. 오! 주 하나님이시여, 제가 언제 당신과 더불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사오며, 제가 언제 당신 안에서 저 자신에 대한 것을 모두 잊을 수 있사오리까? 당신께서 제 안에 거하시고 제가 당신 안에 거하게 하사 당신과 제가 영원토록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15:4).”

켐피스는 어떤 상황에서 이 책을 남겼는가. 아마도 평생에 걸친 기도와 자기부정의 삶, 공동체적 삶(Devotio Moderna·오늘의 헌신운동) 속에서 책을 썼을 것이다. 당신이 신학보다 경건을, 사색보다 예배를, 형식보다 내적 체험을, 의식보다 예수님을 더 좇아간다면 켐피스가 갔던 길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