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불통의 문’] 춘추관, 조선시대 시정 기록하던 곳… 민심과 왕심(王心) 이어줘

입력 2012-08-31 18:20

청와대 춘추관(春秋館)의 뿌리는 고려시대 충렬왕 34년(1308년)에 설립된 예문춘추관이다. 시대 시정(時政) 기록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조선시대에 들어 임금의 명령을 담당하는 예문관과 사초를 담당하는 춘추관으로 분리됐다.

춘추관 사관(史官)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실록(實錄)을 작성했다. 사관 가운데는 상서를 임금에게 전하는 언관(言官)을 겸하는 사람도 많았다.

춘추관장은 겸직으로 영의정이, 감사는 좌·우의정이 맡았다. 사관은 수시로 국정 최고 수뇌부를 만나 주요 국사와 함께 왕과 궁궐의 내밀한 일들을 속속들이 파악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를 평가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경복궁 앞으로 몇 리가 되지 않는 종로 시장통에서 대낮부터 술에 취할 수 있는 관직은 사관과 언관밖에 없었다’고 기록돼 있기도 하다. 그만큼 왕과 정부는 이들을 통해 일반 서민들의 생활과 삶을 전해 듣길 원했다는 뜻이다. 사관과 언관들 역시 궁궐뿐 아니라 각종 시대상을 제대로 알아야 역사를 기록할 수 있다는 투철한 사명감을 가졌다고 한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종로로 대변되는 민심과 인왕산으로 대표되는 왕심(王心)의 언로를 이어주는 역할을 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 패망 때까지 역할과 소임을 다했던 춘추관은 1990년 노태우 정권에 의해 다시 그 이름이 쓰였다. 지금의 자리에 기자실과 기자회견장 등을 갖춘 이곳을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해 달라는 의미로 ‘춘추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춘추관이 지닌 이 같은 의미는 이후 정권에서 오히려 후퇴했다. 93년 등장한 김영삼 정부는 춘추관 상주 기자들의 출입 제한을 검토하다 철회했다. 하지만 여야의 수평적 교체로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99년 기자들의 무제한 본관 출입을 ‘하루 두번 허용’으로 바꿨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본관 전면 출입 제한을 결정했고 이는 2008년 청와대의 새 주인이 된 이명박 정권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신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