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손영옥] 태풍이 전하는 말

입력 2012-08-31 18:45


엄마 노릇 십수 년에 이런 일, 처음인 것 같다.

신문 제작을 위한 편집국 오후 회의가 막 시작된 오후 두시, 아들이 다니는 중학교에서 스마트폰으로 알림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태풍 관련 내일(화) 서울시 초중고 전면 휴업, 학생은 외출 자제를 바랍니다.” 또 문자가 왔다. 이번엔 영어학원인데, 같은 이유로 휴강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기상 문제 탓에 애들 등교가 늦춰진 적은 있으나 통째 수업을 쉰 적은 없었다. 태풍 15호 ‘볼라벤’의 수도권 북상 예고를 하루 앞둔 지난 월요일, 제주를 할퀸 볼라벤의 위력을 목격한 탓인지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귀포 해상에서 집채만한 파도가 어선을 삼킬 기세로 몰아치는 TV 영상은 무서웠다. 사무실과 식당가, 화제는 온통 태풍 얘기였다. 아줌마들은 ‘카톡’으로 유비무환을 당부하는 글을 퍼 날랐다. “이거 사람이 날아다니고 간판이 덮칠 정도로 심각한 태풍이래요. 신문지에 물 묻혀 모든 창문에 붙여야 하고(중략) 신문지가 정 안되면 테이프를 X자로….”

‘안전 둔감증’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10년 전, 미국 연수 시절에 겪은 일이 오버랩됐다. 이번 같은 태풍은 아니지만, 그해 겨울 워싱턴DC 지역에 자주 내린 폭설은 ‘재난 대처 선진국’ 미국을 경험하는 좋은 기회였다. 어느 이른 아침, 가깝게 지내던 페기 할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눈 때문에 초등학교가 갑자기 임시 휴교를 결정한 게 방송에 나왔구나. 혹시 모를까봐 걸었어.” 이건 신호탄이었다. 이후 눈이 조금 심하게 내린다 싶으면 번번이 휴교가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개근을 미덕으로 여기던 나라에서 학교를 다녔던 내겐 생경한 풍경이었다. 자동차 지붕의 눈을 다 제거하지 못하고 도로로 나갔다가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도 있었다. 뒤차의 운전자가 내 차를 세우곤 주의를 줬던 것이다. “눈발이 날려 차의 시야를 가리면 사고가 날 수 있지 않느냐.” ‘안전제일’이 일상화된 미국의 모습이었다.

다음 날, 제주를 지나 상륙한 볼라벤의 위력은 잔뜩 겁먹었던 것과는 달리 약했다. 천연기념물 괴산 삼송리 왕소나무가 뿌리째 뽑히기도 했지만 인명피해나 재산피해도 예상보다 작았다. 태풍 진로가 기상청 예보와 달라, 남부지방에 피해를 입힌 걸 제외하고는 비교적 조용히 한반도를 통과한 탓이다. 시민들의 단단한 대비 덕도 컸을 것이다.

“집안 신문지가 완전 동났어.” “어휴, 거실 유리창에 붙였던 테이프 자국 지우는 게 더 힘들었어.”

태풍이 지나간 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불평이 아니라 안도의 한숨으로 들렸다.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듯도 했다.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들 사이에 안전의식은 이렇게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비싼 슈퍼컴퓨터를 보유한 우리 기상청은 또 도마에 올랐다. 볼라벤이 지나간 지 이틀 만인 30일 북상한 14호 태풍 ‘덴빈’의 예상 진로와 상륙 지점이 다 틀려 피해를 키웠다. 앞서 볼라벤 때도 예보가 틀렸을 뿐 아니라 예상 경로가 미국 일본 등과 달라 조작 시비까지 일었다.

다시 미국의 그때가 생각났다. “오늘 밤 11시부터 워싱턴 지역에 눈이 내리겠습니다.” 미국의 기상 예보 시스템은 강설 시간까지 정확히 예고했다. 어김없이 그 시간엔 눈이 내려 다시 놀랐다. 한반도를 통과한 두 태풍이 뒤돌아보며 이런 말을 던질지 모르겠다.

“야, 대한민국, 국민 안전의식뿐 아니라 기상행정까지 정확해져야 선진국이야.”

손영옥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