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이순신-⑨ 숫자의 달인] 책상 위 숫자 믿지말라
입력 2012-08-31 18:41
[우린 마니아 스타일]숫자는 언제나 사실을 반영한다. 그런데도 숫자를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울고 웃는 사람들이 많다. 주식시장이 요동칠 때, 선거 때 그렇다. 피터 드러커는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는다”며 객관적 숫자를 정확히 보는 것이 경영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경영자나 리더는 기업 혹은 조직과 관련한 다양한 숫자의 의미를 사실에 입각해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아전인수로 숫자를 해석하는 것만큼 위험한 판단은 없다.
경영자 이순신은 언제나 숫자를 지독하게 파악했고 일기에 기록했다. 때문에 일기는 회계장부와도 같았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자신이 경영하는 5관 5포의 재무 및 조직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었고 유비무환의 대책을 준비할 수 있었다.
“전선을 토괴(土塊)에 얹어 만들기 시작했는데, 목수가 214명이다. 물건 나르는 일은 본영 72명, 방답 35명, 사도 25명, 녹도 15명, 발포 12명, 여도 15명, 순천 10명, 낙안 5명, 흥양과 보성 각 10명이 했다.”(1593년 6월 22일) “군량에 대한 장부를 만들고 흥양 둔전에서 추수한 벼 352섬을 받아들였다.”(1596년 2월 8일)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이고서 끌어내리게 했다.”(1595년 9월 2일) 숫자에 얼마나 철저했는지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이순신이 숫자에 밝았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현장주의자 이순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탁상공론을 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문제에 대한 해법을 고민했다. 또 “늦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각 방(房)의 회계(會計)를 살폈다”(1592년 3월 20일)는 것처럼 중장기 계획을 세우기 위해 정기적으로 회계를 살피기도 했다. 그의 숫자에 대한 완벽주의는 “도양의 목장에 딸린 전답의 벼가 20섬 13말 5되”라고 기록한 것처럼 최소 단위라고도 할 수 있는 ‘되’까지 기록할 정도였다.
이순신에게 숫자는 진중 경영의 시작과 끝이었다. 그가 그렇게 철저하게 숫자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새로 전선을 건조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아 군량을 사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항상 물자부족, 인력부족에 시달리며 임시방편에만 매달려 전쟁에서 승리는 고사하고 수군을 유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처럼 현명한 리더는 숫자의 힘을 활용할 줄 안다. 오늘은 ‘통계의 날’이다. 숫자를 현장에서 살아 숨쉬게 해 보자.
박종평(역사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