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박희돈] 11년 동안 노숙인에 무료 국밥 허기진 영혼을 살찌우다

입력 2012-08-31 17:57


박희돈 밥사랑열린공동체 대표 길벗교회 목사

지난 24일 오후 9시 서울 영등포역 광장. 이곳에 모인 노숙인들은 부슬비를 맞으며 국밥을 먹고 있었다. 이들은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간이테이블에 앉거나 인근 백화점 처마 밑에 서서 급하게 한 그릇을 해치웠다. 그리고는 재빨리 밥사랑열린공동체의 밥차 앞 배식대에 가 다시 줄을 섰다. 한 그릇 더 먹기 위해서다.

“이분들 하시는 말씀이 밖에 있으면 항상 배고프대요. 먹을 게 손에 있는 순간에도요. 마음이 허한 거죠. 배가 아니라.”

급식에 나선 길벗교회 김재도(38) 전도사가 노숙인이 사용한 간이테이블을 정리하며 말했다. 마음까지 고픈 이들을 위해 밥사랑열린공동체 대표 박희돈(56) 목사는 토요일을 제외하고 11년간 매일 영등포역 노숙인의 저녁밥을 챙긴다. 그가 이날 준비해 간 식사는 돼지국밥 400그릇. 준비하는 식사량은 노숙인의 숫자와 상관없이 밥그릇 수로 계산한다. 혼자서 3∼4그릇을 먹는 노숙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 목사는 노숙인에게 “남길 걱정 말고 맘껏 먹으라”고 말하며 국밥을 퍼 준다. 그 역시 노숙인들이 마음도 허기져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안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이 목사님 참 좋아, 어떡하면 노숙인 한 명 더 먹일까 그 생각해, 우리 노숙인은 딱 보면 알아, 상대방이 진심인지 아닌지.” 박 목사가 배식하는 것을 지켜본 한 할머니 노숙인이 어눌한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비가 온 이날도 어김없이 준비해 온 식사가 금세 동이 났다.

밑 빠진 독에 재산 쏟아 붓는 ‘미친놈’

그날 서울 영등포동 길벗교회에서 만난 박 목사의 첫인상은 독특했다. 넉넉한 풍채에 은발의 곱슬머리와 흰 턱수염을 기른 그는 인심 좋은 이웃 아저씨를 연상케 했다. 그가 이런 외모를 가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교수로 학생을 가르치고 원자력병원 원목실장이자 구립 어린이집 원장이던 그는 한때 ‘잘 나가던 목회자’였다. 한 달 수입이 1000만원 정도가 됐다. 대학에 진학한 자녀에게 차를 사 줄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이랬던 그의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결정적 계기는 2001년 12월 영등포역에서 한 여자 노숙인을 만나고부터. 칼바람이 살을 에는 겨울밤의 추위에도 맨살이 드러나는 빨간 여름 원피스를 입은 그 여성은 택시를 기다리는 그를 지나 옆의 쓰레기통에 버려진 컵라면 국물을 마셨다. 온몸에는 멍이 들어있었다.

“‘왜 이 시간에 이런 걸 먹느냐’고 물으니 ‘낮에 뭘 얻어먹으려고 나가면 자칫 남자 노숙인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니 밤늦게 나온다’는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현역 목사이자 사회복지사인 내가 엉뚱한 데서 헤매고 있구나, 이분들을 위해 내가 밥을 줘야겠다’고요. 아마 하나님께서 이걸 알게 하려고 그분을 제게 보낸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그 모습은 충격이었습니다.”

박 목사는 2002년 노숙자를 위해 ‘섬김과 나눔의 교회(현 길벗교회)’를 세우고 전 재산을 노숙자 끼니 마련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월급과 자가용, 비자금까지 노숙인의 밥을 만드는 데 들어갔다. 3년 뒤 배식인원이 점차 늘어나자 교수, 원목실장, 원장의 3개의 일을 그만두고 목회자로서 노숙인 밥상 차리는 데만 전념했다.

하지만 아무도 공감할 수 없는 나눔이었다. 몇 달이 지나자 그를 돕던 70∼80명의 교인이 떠났다. 가족도 두 손을 들었다. 미국으로 떠나자는 아내와 딸의 요청을 무시한 채 노숙인 사역에 전념했다. 1년간의 실랑이 끝에 그는 결국 2005년 이혼서류를 받았다. 그의 이런 모습에 주변의 동료 목회자나 교수들은 박 목사를 ‘미친놈’이라 불렀다. 그의 외모가 변한 건 이때부터다.

“가족과의 의견 차이로 목회자인 제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혼자 깊이 생각하다보니 스트레스로 면역기능이 떨어져 한쪽 귀의 청력과 일부 기억을 잃었죠. 다른 한쪽도 정상인의 25% 정도의 청력으로 버티고 있고요. 외모도 변했습니다. 당시 청력 회복을 위해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했는데 부작용으로 살이 많이 쪘어요. 청력 상실로 균형기능이 떨어져 지팡이도 짚고 다녔었고. 다만 수염은 신변보호용으로 기른 겁니다. 수염을 길러야 노숙인들이 연장자로 보고 행패를 덜 부리거든요.”

희망은 노숙인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내려놓음을 실천하자 그의 곁에 노숙인들이 찾아왔다.

“성직자임에도 가정이 틀어지고 형제·친구도 날 공감하지 못할 때, 3급 장애인으로 진단 받고 돈 한 푼 없을 때, 그때부터 노숙인들이 마음을 열고 반겨줬습니다. 이미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제가 겪은 일이 새롭지 않았던 거죠.”

기적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어떤 일이 있어도 후원이 끊이지 않았다는 게 그 방증이다. 월세는 못 내도 배식은 중단된 적이 없었다. 건강도 재산도 챙기지 않는 노숙인을 돌보는 그의 모습에 스님과 무당까지 나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노숙인이 신앙을 갖고 변화되는 모습을 가까이서 목격하는 순간이다.

“우리 노숙인 형제들이 집사가 돼 다른 이를 도우며 신앙을 키워가는 걸 보며 저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베풀 줄 모르던 이들이 일을 하고 그 돈으로 십일조를 헌금해 노숙인을 돕기까지 정확히 10년 걸렸습니다. 아직 술도 마시고 담배도 못 끊는 집사가 7명, 성도가 27명이지만요.”

하지만 사회가 노숙인을 무턱대고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 매도할 때 힘이 빠진다고 했다.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수고를 헛되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 ‘묻지마 범죄’가 늘어나는데, 언론이나 경찰은 범죄자 신원 확인이 안 되면 노숙인으로 간주해요. 아주 잘못된 관행입니다.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소수 있긴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고아거나 장애로 버려진 이들입니다. 외적으론 건강해 보여도 정신건강이 좋지 않고 지적수준이 낮아 독립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들이란 거죠. 전과가 있어도 남들에게 속아 대포폰이나 대포통장을 만들거나 사회화가 덜 돼 노상방뇨로 구치소 다녀온 게 전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 목사는 노숙인을 ‘자활의 대상’이 아닌 ‘돌봐야 할 사회적 약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 불황으로 생긴 노숙인은 상당수 사회에 복귀했고, 지금 남은 사람들은 지적 능력이 부족한 이들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외톨이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경제적·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종교단체나 시민단체가 책임 있게 돌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난 22일 1년을 맞은 ‘서울역 노숙인 퇴거조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뜻을 밝혔다.

“노숙인 급식이나 전용시설이 자활을 방해한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를 없애도 노숙인이 줄지 않아요. 다만 흩어질 뿐이죠. 이분들은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고, 저학력으로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어요. 행정조치만으론 이들에게 자활의지를 불어넣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 인생에 믿을 만한 대상을 만들어주는 게 더 효과적이죠.”

아픔은 가족과 한국교회 현실

박 목사는 자신의 인생 관심도 1순위가 노숙인이라고 했다. 그는 노숙인을 ‘내 가족을 포기할 만큼 소중한 대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그에게도 가족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당시 내가 ‘너무 고집을 피우지 않았나’란 생각을 종종 해요. 또 지난 6월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는데 지금도 반식물인간 상태로 상당히 힘든 형편이고. 최근엔 5년간 키운 아이를 입양해 호적을 바꾸려 하는데 가진 재산이 없어 입양 판결이 안 떨어질까 걱정입니다.”

세상에서 비난받는 한국교회의 지나친 배금주의도 그에겐 아픔이다. 박 목사는 모든 교회 문제의 원인을 ‘교회 안에만 있는 돈’으로 꼽았다. 돈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고 교인이 상처를 입는데 이는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라고 했다.

“돈으로 상처 받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한 한국교회에 희망은 없습니다. 이곳에서 하루만 봉사해 보세요.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돈으로 망가질 위기에 있는 어떤 교회 교인들이 최근 여기서 봉사하고 웁디다. 우리 교회 한 해 예산이 수십억원이 넘는데 여긴 50만원으로 450명을 푸짐하게 먹이는 이런 큰일을 한다는 게 신기한 거야.”

그래서 그는 교회의 부흥을 ‘내 손으로 추수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자본주의 사회처럼 외형으로 판단되는 교회 부흥은 잘못된 것입니다. 초기의 한국교회처럼 복음 전도, 구제, 선교에 집중하는 게 진정한 부흥을 위한 첩경입니다. ‘꼭 우리교회에 나오라’고 말하지 말고 종교·인종을 초월해서 무차별적으로 돕는 게 중요합니다.”

밑바닥에 있을 때, 주님이 날 보러 오실거야

오는 11월, 그는 다른 목회자와 함께 경기도 하남에 예동교회를 세운다. 교회 재정의 80%를 종교와 지역 상관없이 어려운 이웃에게 쓰는 것이 이 교회의 목표다.

내년 3월엔 노숙인을 위한 대안학교인 ‘새삶학교’도 시작한다. 박 목사는 올해 3월부터 매주 수요일 1시간 동안 노숙인 20여명을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강의를 해 왔다. 강의는 주로 사회 예절이나 인성 등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서울 근교에 농장을 마련해 ‘노숙인 힐링센터’를 만드는 일도 구상 중이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이들인 만큼 속이지 않는 자연에서 일과 쉼을 동시에 제공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14명의 노숙인과 같은 건물에서 함께 산다. 건물이라지만 쥐와 고양이와 함께 지내야 하는 공간이다. 예배당은 지하 다방을 개조했다. 박 목사는 무엇을 위해 이러한 어려움을 참고 노숙인에게 밥을 차리는 걸까.

“목회자는 ‘밑바닥 인생’을 살면 살수록 성공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사람은 밑바닥을 즐기는 자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노숙인에게 욕 듣고 맞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언젠가 저 대열 속에 주님이 나를 보러 찾아오지 않겠나’란 생각 때문에….” 안경 너머 그의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