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김용호] 한·중·일 인식공동체 만들자

입력 2012-08-30 19:34

최근 불거진 한·중·일의 영토 분쟁이 종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시비로 번지면서 3국간의 갈등이 태평양시대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래 최근까지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이었으나 21세기 들어 태평양이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을 시작으로 이른바 네 마리의 용, 한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이 산업화에 성공한 데 이어 최근 중국이 본격적으로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태평양시대를 이끌어가야 할 한·중·일이 영토 분쟁과 과거사 문제로 외교적 소모전을 벌이고 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특히 각국의 정치인들이 말로는 미래지향적인 양자관계를 역설하면서 행동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얼마 전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발효시키려고 꼼수를 부리던 이명박 정부가 갑자기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이어 일왕이 방한하려면 사죄가 필요하다고 훈계를 하는 바람에 일본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국민의 반일 감정을 자극하여 일시적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하고 레임덕을 방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국익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나쁜 전례를 남기는 꼴이 되었다.

앞으로 우리나라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지 않으면 애국심을 의심받게 되었고, 일왕의 사죄를 요구하지 않으면 친일로 몰릴지도 모르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일본 정치권의 반응은 더욱 한심하다. 일본 정치인들이 경쟁적으로 한국을 비방하면서 자신들이 스스로 만들었던 과거사 사죄 담화를 모두 바로잡겠다고 역설하고 있으니 이 무슨 망언인가? 더욱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홍콩의 과격한 시민단체가 상륙을 시도하고 주중 일본대사 승용차가 피습을 당하는 등 중·일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어제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일본이 한국 위안부를 사후에도 욕보이고 있다”고 분노를 쏟아냈다. 한·중·일의 이전투구는 마치 브레이크 없는 차가 비탈길을 내려오는 모습이다.

이런 와중에도 한·중·일의 장래에 한 줄기 빛을 발견하여 너무나 반가웠다. 3개국 대학생 60명이 1주일간 도쿄와 교토 등지에서 합숙하면서 환경문제를 토론하고 쓰나미 피해 현장을 찾아 나무를 심었다. 동북아는 바다로, 하늘로 연결돼 있어 어느 한 국가만의 노력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3국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들이 동아시아 환경문제에 관한 새로운 ‘인식공동체(epistemic community)’를 형성한 것이다.

사실 유럽통합 이론가들은 유럽연합이 지금까지 발전해 나온 배경에는 인식공동체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한다. 정계, 관계, 학계, 언론계, 재계 등에 종사하는 유럽 각국의 전문가들이 국경을 초월하여 유럽의 장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문제점을 미리 발견하여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네트워크가 바로 유럽 인식공동체이다. 한·중·일을 비롯한 동아시아에도 이런 인식공동체가 전반적으로, 그리고 이슈별로 형성 발전되어 나갈 때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이 가능해지고, 동아시아에도 유럽연합처럼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인구나 경제규모를 볼 때 중국이나 일본을 힘으로 제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공동체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우리나라 전문가들이 중·일 전문가들과 함께 동아시아의 미래를 구상하고 설계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창출해 낼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전문가들이 한반도 통일 없이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이 불가능하고, 또 한반도가 통일되면 그 혜택이 주변국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된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인식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김용호 인하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