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의 풍경-댄디보이 박인환] 모더니스트 기수 박인환에 대한 김수영의 콤플렉스

입력 2012-08-30 18:36


(하) 문우 김수영과의 악연

시인 박인환(1926∼1956)이 김수영(1921∼1968)을 처음으로 만난 건 서점 ‘마리서사’를 개업한 직후인 1945년 말이지만 두 사람을 연결시켜준 것은 문학이 아니라 연극이었다. 일본 도쿄의 미즈시나 하루키(水品春樹) 연극연구소에서 연극을 배운 김수영은 1943년 학도병 징집을 피해 귀국, 당시 신파극과 결별하고 국민연극운동을 벌이고 있던 미즈시나 출신의 연극인 안영일을 찾아가 연출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국이 뒤숭숭해진 이듬해 봄, 먼저 중국 만주로 건너간 가족과 합류하기 위해 경성을 거쳐 길림(지린)시로 떠나간다. 길림에서 조선 청년들로 구성된 길림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한 그는 안영일, 오해석, 심영 등과 어울리며 독일 희곡 번안작품인 ‘춘수(春水)와 같이’에서 로만칼라를 한 신부 역을 맡는 등 연극인의 길을 걷다가 해방을 맞아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다.

당시 경성은 도쿄, 오사카, 베이징 등지에서 귀국한 문화인들로 차고 넘쳤다. 이들은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명동으로 몰려들었다. 김수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안일영과 연극을 하면서 알게 된 박상진을 만나기 위해 명동 소재 극단 ‘청포도’ 사무실을 찾았을 때, 박상진은 먼저 와 있던 멋쟁이 신사를 소개해주었다. 얼마 전 종로통에 ‘마리서사’를 개업했다는 박인환이었다.

“인환을 처음 본 것이 박상진이가 하던 극단 ‘청포도’ 사무실의 2층에서였다. (중략) 해방과 함께 만주에서 연극운동을 하다 돌아온 나는 이미 연극에는 진절머리가 나던 때라 그의 말은 귀언저리로 밖에는 안 들렸고, 인환의 첫 인상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김수영 산문 ‘마리서사’에서)

김수영은 이듬해인 1946년 3월 문학평론가 조연현을 주축으로 한 ‘예술부락’ 제2집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한 직후 ‘마리서사’로 박인환을 찾아가 등단 잡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직 등단 전이었던 박인환의 반응은 싸늘했다. 박인환은 ‘묘정의 노래’를 습작 수준의 작품으로 취급한 것은 물론 ‘예술부락’을 한번 훑어보더니 ‘마리서사’의 구석에 처박아버렸다. 김수영 자신도 등단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연극을 그만둔 뒤로 집에 들어앉아 쓴 시 가운데 20편을 조연현에게 보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가장 모던하지 않으며 저수준인 ‘묘정의 노래’가 뽑혔다고 불평했다. 어쨌든 김수영은 ‘묘정의 노래’ 때문에 박인환을 비롯한 ‘마리서사’의 모더니스트 시인들로부터 혹독한 비판과 수모를 당했다.”(2001년 최하림 ‘김수영 평전’)

박인환에 대한 김수영의 콤플렉스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박인환은 김수영의 등단 자체보다 등단작의 수준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김수영의 등단보다 9개월 늦은 1946년 12월 ‘마리서사’의 단골이던 송지영의 추천을 받아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고 등단한 박인환은 겨우 스무 살 나이에 장안의 문인들을 끌어안는 넉넉한 품을 열어 보이며 어엿한 모더니스트로 자리를 굳혀 가고 있었다. 실제로 박인환은 김경린 등과 함께 ‘신시론’ 동인을 만들 때 김수영을 참여시키며 그의 문단 활동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박인환이 내가 일하고 있던 남대문의 사무실에 찾아왔어요. 1947년이었지요. 박인환의 나이가 스물두 살이었는데,… (중략)… 그날 저녁에 만나 여러 이야기를 하고 그의 시 ‘장미의 온도’라는 시를 보여주고 한번 같이 하자고 의기투합해서 동인이 되었지요. 둘 가지고는 안 되고 누가 더 없냐고 그랬더니, 김수영을 만나보자 해서 충무로 쪽에 있던 집을 그날로 곧바로 찾아가 만났어요. 김수영의 집은 무슨 음식점 비슷한 것이었는데, 김수영은 너희들이 하자고 하니 나도 같이 하겠다고 무조건 동조했어요.”(2003년 김경린·한수영 대담 ‘증언으로의 문학사’)

등단 이후 발표 지면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김수영에게 발표 기회를 제공한 것도 박인환이었다. 김수영은 1949년 4월 1일자 ‘자유신문’에 시 ‘아침의 유혹’을 발표했는데 이 역시 박인환의 배려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박인환은 1948년부터 ‘자유신문’ 기자로 일했다.

이후 두 사람은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과 ‘후반기’ 동인에도 같이 참여했으나 박인환이 1956년 작고하기 직전까지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해 나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김수영은 이렇다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게다가 경남 거제도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시기(1951년 1월∼1953년 5월)를 감안하면 김수영은 전쟁 직후의 상실감과 허무주의를 짙게 띤 ‘목마와 숙녀’ 등의 시를 발표하며 당대 모더니스트의 기수로 떠오른 박인환과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였다.

1956년 ‘세월이 가면’ ‘죽은 아포롱’ ‘예날의 사람들에게’ 등을 발표하며 한창 주가를 올리던 박인환은 그해 3월 20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인 17일 열린 ‘이상 추모의 밤’에서 죽음을 예감한 듯한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세월은 가면’의 작곡가 이진섭에게 ‘인간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적힌 쪽지를 전하고는 “누가 알아 절필이 될는지”라고 한마디 던졌다고도 전해진다. 또 “관(棺) 뒤에 누가 따라오느냐. 죽어선 모르지만, 아 그래도 누가 올 것이다”라는 독백을 남겼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명언으로 남아 있다. 당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의 일갈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은 김수영은 이로부터 10년 뒤인 1966년 8월 박인환에 대한 증오를 쏟아낸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을 때도 나는 장례식에를 일부러 가지 않았다. (중략)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뽀롱’이 다 뭐냐?”(산문 ‘박인환’)

‘원정’ ‘배코니아’ ‘아뽀롱’은 모두 박인환이 즐겨 쓰던 단어들이다. ‘원정’은 시 ‘센티멘털 쟈니’에, ‘배코니아’는 시 ‘거리’에, ‘아뽀롱’은 시 ‘죽은 아포롱’에 나오는 단어지만 김수영은 박인환의 현란한 현대용어의 나열을 표가 나게 혐오했던 것이다. 김수영의 글은 이어진다.

“내가 6·25 후에 포로수용소에 다녀와서 너를 만나고, 네가 쓴 무슨 글인가에서 말이 되지 않는 무슨 낱말인가를 지적했을 때, 너는 선뜻 나에게 이런 말로 반격을 가했다.-‘이건 네가 포로수용소 안에 있을 동안에 새로 생긴 말이야’-그리고 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물론 내가 일러준 대로 고치지를 않고 그대로 신문사인가 어디엔가로 갖고 갔다. 그처럼 너는, 지금 내가 이런 글을 너에 대해서 쓴다고 해서 네가 무덤 속으로 안고 간 너의 ‘선시집’을 교정해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교정해 가지고 나올 수 있다 해도 교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도 해본 일이 없다고 도리어 나를 핀잔을 줄 것이다. ‘야아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서 부지런히 성공해라!’하고 삥긋 웃으면서, 그 기다란 상아 파이프를 커크 다그라스처럼 피워물 것이다.”(산문 ‘박인환’)

박인환 생전에는 거의 존재감이 없던 김수영이 박인환 사망과 함께 그 영향을 걷어내기 위해 절치부심했다는 것은 역사의 숙명이다. 하지만 김수영 문학은 박인환 없이는 불가능했다. 죽은 박인환에 대한 김수영의 가열찬 공격은 거꾸로 그의 박인환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박인환은 김수영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았고 김수영은 박인환을 가짜 시인으로 치부했다. 시대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진정한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원하던 김수영은 다섯 살 연하인 박인환의 시를 ‘지나가는 유행’으로 폄하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생존을 모색했던 것이다.

박인환에게 수모 당한 김수영의 이 같은 태도란 어떤 측면에서 박인환으로부터 전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수영의 시대도 오래 가지 못했다. 산문 ‘박인환’과 ‘마리서사’에서 박인환에 대한 애증을 가감 없이 쏟아놓았던 김수영은 이로부터 2년이 지나지 않은 1968년 6월 15일 밤 11시10분쯤, 귀갓길에 서울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어 적십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튿날 아침 숨을 거두었다. 역사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인환과 수영. 그들은 한 시대를 치열한 모더니스트로 살다간 문학적 샴쌍둥이였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