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차정식] 누가 우리의 이웃이 아닌가

입력 2012-08-30 18:45


불길한 낱말 하나가 항간을 떠돌고 있다. ‘묻지마 범죄’라는 신조어가 풍기는 섬뜩함은 이제 동네골목조차 긴장하며 걸어야 하는 불안감을 부추긴다. 지난 두 주간 동안 8건의 무차별 폭행 사건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이 24명이나 된다. 나와 내 가족, 선량한 이웃들이 언제 어디서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기에 불안감은 가중된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런 폭력공화국이 됐는지, 듣기에도 불쾌한 이런 소식은 국민 모두를 잠재적 피해자로 압박한다.

버림 받은 음지의 사람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언제부터 어떻게 꼬여왔기에 이런 흉포한 사태가 개선의 조짐을 보이기는커녕 점점 악화되는 걸까. 예전에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분석과 진단은 풍성했고, 유사한 내용이 지금도 되풀이된다. 이러한 무차별 폭행에 연루된 가해자들은 대체로 경쟁에서 낙오한 패자들로 사회 전체를 공공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다 보니 가족과 사회로부터 철저히 단절된 외톨이로 울분을 키우다 한순간 그 보복심리가 불특정 다수를 향해 폭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시되는 대안은 사회적 안전망 구축과 복지체계 확충, 지나친 경쟁풍조의 완화를 위한 공동체 성원들의 자각과 관용, 성격장애 등 정신적 문제를 지닌 사회부적격자들에 대한 상담치료의 활성화 등이다. 좀더 강력한 대책으로 이러한 사람들을 철저히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범죄의 소굴에 빠져 사회의 음지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사연은 제각각 다채롭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면 그들도 천진한 생명으로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좋은 날을 보리라는 미래의 희망을 품지 않았을까. 어쩌다 부모 잘못 만난 죄로, 또는 순간의 어긋난 판단과 탈선으로, 점점 더 컴컴한 벼랑 끝으로 밀려나다 보니 만회할 수 없는 극단의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들을 둘러싼 사회경제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그러한 음지의 상황을 방조한 혐의도 무시할 수 없다.

이웃 없는 믿음의 삶 어려워

아무리 좋은 제도를 운용하고 정책을 실행해도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그 벼랑 끝의 생명들을 향해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소득은 신통치 않다. 무엇보다 그들이 내 이웃이라는 자각과 함께 나와 다른 인간을 향한 온갖 편견과 맞서 싸우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조금씩 손해 볼 각오를 가지고 예수의 정신을 따르려는 결의도 요청된다.

예수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가르치면서 제 몸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는 관념적 율법사를 향해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면서 자신의 모든 정성으로 고통에 처한 생명을 돕는 선한 이웃이 되라고 충고했다. 단지 말의 교훈에 그치지 않고 예수는 당시 버림받은 변두리의 불우한 생명들을 치열한 연민으로 감싸면서 돌봤다. 그들을 부정한 죄인으로 내치려는 종교적 인습에 대항하여 전투적인 사랑을 실천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웃마저 가려 사귀고 있다. 이웃이 되지 못하는 음지의 생명들은 특정 부류로 낙인찍고 딱지 붙이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수상한 남들과 분리되어야 안심이다. 무슨 좋지 않은 전력을 지닌 자들에게 패자부활전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그들을 깔끔하게 위생 처리하고 그 경계지대에 방부제를 듬뿍 쳐대야 자신의 행복이 증진될 것 같은 자폐적 환상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이웃의 불행이 내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게 성서의 가르침이다. 이웃 없는 자를 제 몸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믿음 충만을 내세운들 예수의 제자 된 삶을 살 수 없다는 현실도 엄연하다. ‘누가 우리 이웃인가’를 묻기 전에 ‘누가 우리 이웃이 아닌가’를 먼저 묻고 온몸으로 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정식 한일장신대 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