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의사실명제 무산, 직역이기주의 버려라

입력 2012-08-29 19:24

병·의원 등 의료기관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의료급여를 신청할 때 의사 이름을 함께 적도록 하는 의사실명제가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단체의 반발로 끝내 무산됐다. 보건복지부가 올해 중 시행을 목표로 지난해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해 논의를 중단한 것이다.

의사실명제는 지난해 5월 국민권익위원회가 환자의 권익보호를 강화하라고 복지부에 권고하면서 논의가 시작됐다. 이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의료인의 진료책임성을 높여야 한다는 의원들의 지적이 잇따르자 추진에 탄력을 받았다.

이 제도는 거창하게 실명제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의료기관, 질병, 진료일수, 진료내용 및 청구액 등을 적도록 한 현행 급여청구서에 진료를 담당한 의사의 이름, 면허의 종류·번호를 추가로 기재토록 하는 것이다.

복지부는 이를 통해 환자의 알권리가 강화되고, 보험금 부당청구를 억제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의료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의사들은 위헌 소지가 있는 과잉규제이며, 환자가 아니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알권리를 보장하려는 것이고, 정부가 의사를 평가하려는 속셈이 있다며 반발해 결국 논의 자체가 무산됐다.

우리나라의 의료 환경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누구든 대형병원에 다녀온 사람은 2∼3시간을 기다렸다가 2∼3분 만에 진료가 끝나는 현실에 불만을 터뜨린다. 어렵게 만난 의사는 왜 아픈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의사에 대한 불신도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을 위협하는 허위·부당 청구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잊을만하면 드러나는 리베이트 사건도 의사를 믿지 못하게 하는 큰 이유다.

의사실명제가 의료계의 문제점을 한번에 해결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정부와 의사, 관련단체들이 환자의 입장에서 논의를 진행해 하나씩 대책을 찾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의사 1인당 진료건수가 기준을 넘을 경우 수가를 차감해 지급하는 차등수가제 확대시행은 의사실명제를 전제로 한다. 대형병원의 환자집중, 불친절한 서비스 등은 이를 통해 상당히 해소될 수 있다.

최근 포괄수가제 논란 속에 의료계가 ‘수술거부’를 선언하면서 의사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수술거부 방침이 철회돼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의사들의 직역이기주의는 국민들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지난 18일 시작된 환자안전법 제정을 위한 민간차원의 청원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는 것도 의사에 대한 불신과 무관치 않다. 의사단체는 이 같은 국민들의 생각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환자를 먼저 생각한다는 원칙 아래 복지부와의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