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슬로시티… ‘느림의 미학’을 걷는다] ② 청산도 & 증도

입력 2012-08-29 17:44


산비탈 ‘구들장논’ 독특 청산도·노을에 물든 ‘소금밭’ 장관 증도

청산도 (전남 완도)

청산도는 ‘느림의 미학’이 지배하는 섬이다.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이 의붓딸 송화와 진도아리랑을 주고받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던 청산도. 그 섬으로 오가는 배는 청산도에서 태어나 청산도 초분(풀무덤)에 뼈를 묻을 섬사람들의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사투리로 떠들썩하다.

슬로시티이자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된 청산도는 느낌표와 쉼표가 되어 마라톤 풀코스와 같은 11개 코스의 슬로길 42.195㎞를 구성진 가락의 진도아리랑처럼 느릿느릿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청산도의 관문인 도청항에서 ‘느림의 종’을 타종하고 언덕을 오르면 당리 돌담길로 들어선다.

당리 입구의 창고 벽에 그려진 원색의 벽화는 ‘서편제’의 세 주인공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걷던 황톳길을 재현했다. 투박한 질감의 당리 돌담길은 계절마다 화려한 원색으로 단장한다. 노란 유채꽃과 푸른 청보리밭이 청산도의 봄을 상징한다면 초가을 문턱에 들어선 요즘은 해맑은 얼굴의 코스모스가 파도소리를 장단 삼아 덩실덩실 춤을 춘다.

청산도는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인 왈츠하우스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답다.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창문을 열면 청산도의 풍경이 방안으로 성큼 들어온다. 돌담길 왼쪽은 가파른 언덕을 깎아 만든 다랑논과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둘러싼 도락리 포구. 돌담길 오른쪽은 당리 마을로, 강렬한 색채의 슬레이트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정담을 나눈다.

당리 돌담길은 풍경도 아름답지만 청산도 사람들의 풋풋한 삶을 엿보는 창이다. 따가운 햇살 아래서 숙명처럼 밭일을 하는 아낙, 이른 아침 지게를 지고 돌담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촌로,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구들장논으로 향하는 노부부들…. 하나같이 느린 삶을 살아가는 청산도 사람들의 모습이다.

왈츠하우스에서 드라마 ‘해신’ 촬영장을 거쳐 화랑포를 돌아 나오면 사랑길이 기다린다. 해안절벽을 에두르는 사랑길은 청산도의 청춘남녀들이 남몰래 데이트를 즐기던 곳. 슬로길은 부드러운 곡선의 다랑논이 104계단을 이루고 있는 읍리를 거쳐 청계리에서 구들장논을 벗한다.

구들장논은 흙과 물이 귀한 청산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논. 산비탈에 다랑논을 개간할 때 논바닥에 넓은 돌을 구들처럼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들었다. 윗논에서 사용한 물을 아랫논에서 쓸 수 있도록 구들을 깔 때 수로도 만들었다. 최근에는 한국농업유산연대를 중심으로 구들장논을 지키기 위한 모금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청산도 슬로길은 상서리에서 정겨운 돌담길을 벗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상서리의 돌담은 조형미가 뛰어나거나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섬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을 뿐이다. 상서리의 돌담은 구불구불해 몇 발짝만 걸어도 느닷없이 가족이나 이웃을 조우하는 구조다.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동촌리의 돌담길도 상서리 못지않다.

슬로시티 청산도의 멋과 낭만은 양중리에 위치한 느린섬여행학교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폐교가 된 청산중학교 동분교를 리모델링한 느린섬여행학교는 슬로푸드체험관과 숙박동 등을 갖춘 다목적 복합시설. 청산도탕 등 마을 주민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청산도 음식을 맛보고 아늑한 침실로 바뀐 교실에서 초롱초롱한 별을 헤다 보면 ‘서편제’의 스크린 속으로 빨려든다.

여행메모=완도항에서 청산도까지 철부선이 하루 7회 왕복 운항한다. 45분 소요. 배에 승용차도 싣고 갈 수 있지만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고 싶으면 맨몸으로 가는 것이 좋다. 광주에서 완도까지 직행버스로 2시간. 청산도에는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푸른섬밴드’가 있다. 섬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주기 위해 수시로 공연을 펼친다. 느린섬여행학교에서 맛볼 수 있는 슬로푸드는 남도밥상(2만5000원)과 건강밥상(7000원). 청산도 고유음식인 청산도탕을 비롯해 톳밥, 문어숙회, 김전, 전복장 등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이한 음식들이 나온다. 숙소는 음악실, 미술실 등으로 꾸민 테마동 5개와 교사 관사를 리모델링한 가족실 5개가 있다(061-554-6962).

완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증도 (전남 신안)

신안 앞바다의 보물섬으로 불리는 증도는 슬로시티로 지정된 후 상전벽해의 변신을 거듭했다. ‘금연의 섬’으로 선포되면서 담배꽁초가 사라지고 모든 주민이 친환경 세제를 사용하고 유기농 농사를 짓는 등 환경보호에 발 벗고 나섰다. 밤하늘의 별을 보는 ‘다크 스카이(Dark sky)’ 운동을 시작하면서 불필요한 전등을 소등해 관광상품화 하는가 하면 민박집도 9개에서 108개로 늘어나 주민 소득향상에 한몫하고 있다.

증도 여행은 주민들이 설립한 생태여행사 ‘길벗’의 안내를 받아 주민들이 마실을 다니던 47.2㎞ 길이의 ‘모실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둘러봐야 제격. 증도대교에서 구분포와 염산포구를 거쳐 해저유물발굴기념비까지 이어지는 ‘노을이 아름다운 사색의 길’은 증도가 숨겨놓은 보석 같은 길. 검산 산허리에 오르면 도덕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서럽도록 붉은 태양이 가라앉는 곳은 도자기와 동전 등 2만3000여점의 중국 송·원대 해저유물이 600년간 잠들어 있던 검산 앞바다.

해저유물발굴기념비에서 만들독살과 검산항을 거쳐 짱뚱어다리까지 이어지는 ‘보물선 순교자 발자취 길’은 증도를 대표하는 길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기념비를 벗한다. 유네스코 갯벌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갯벌을 가로질러 우전해수욕장과 증도면 소재지를 연결하는 470m 길이의 짱뚱어다리는 증도를 상징하는 아이콘.

짱뚱어다리에서 해송 숲을 거쳐 갯벌센터에 이르는 ‘천년의 숲길’은 갯벌과 연결된 우전해수욕장을 지난다. 백사장 길이가 4㎞인 우전해수욕장은 금빛 모래가 밀가루처럼 고운데다 갯벌은 미네랄이 풍부한 게르마늄 성분을 함유해 해수욕과 머드마사지를 겸할 수 있다. 우전해수욕장을 포근하게 감싼 해송 숲은 하이킹을 겸한 산책로.

갯벌센터에서 대초리를 거쳐 화도를 한 바퀴 도는 ‘갯벌공원 길’의 하이라이트는 1.2㎞ 길이의 노두길. 노두(露頭)는 개펄 위에 돌을 놓아 건너다니던 징검다리로 물이 차면 사라지고 물이 빠지면 모습을 드러낸다. 화도(花島)는 해당화가 많이 핀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노두길에서 태양광발전소와 소금박물관을 거쳐 증도대교로 되돌아오는 ‘천일염 길’은 단일염전으로는 우리나라 최대인 태평염전을 관통한다. 140만평 규모의 태평염전은 인공위성에서도 식별이 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60여 채의 소금창고가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증도대교가 완공되기 전 철부선이 드나들던 버지선착장 주변의 갯벌은 짱뚱어, 농게, 고둥 등이 바글거리는 생태계의 보고. 개흙을 뒤집어 쓴 짱뚱어가 지느러미를 세운 채 갯벌에서 펄떡펄떡 뛰어다니고 소심한 농게들은 백로와 왜가리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일제히 게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증도의 하루는 태양광발전소 옆 야산에 위치한 소금밭 전망대에서 완성된다. 보석처럼 영롱한 소금 결정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고무래질을 하던 염부가 떠나자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흐르던 바둑판 모양의 염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해가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은 후 하늘과 염전은 마지막 혼을 불사르기라도 하듯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다.

여행메모=서해안고속도로 함평분기점에서 무안광주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북무안IC에서 내린다. 60번 지방도로와 24번 국도를 타고 지도읍에서 805번 지방도로 갈아타면 사옥도와 증도를 연결하는 증도대교가 나온다. 짱뚱어 다리 옆에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수차 돌리기, 소금채취 체험 등이 가능한 태평염전(061-275-7541)에는 소금박물관을 비롯해 칠면초와 함초 등이 자생하는 태평염생식물원, 천일염의 우수성을 오감으로 느껴보는 소금동굴힐링센터 등이 있다. 우전해수욕장 인근의 엘도라도리조트(061-260-3300)는 별장형 고급 휴양시설. 끝없이 펼쳐진 리아스식 해안에 해수찜, 노천탕, 전통 불한증막, 한식당, 해양레포츠시설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신안=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