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아흔살 YWCA와 45년… 이젠 100년의 비전 키워갈 것”

입력 2012-08-28 19:55


설립 90주년 맞은 한국YWCA연합회 차경애 회장

망백(望百). 백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아흔한 살을 이르는 말이다. 한국YWCA연합회가 올해 우리 나이로 망백을 맞았다. 어느 조직이나 망백을 맞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한국YWCA연합회는 망백을 넘어 100주년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이 땅에 여성이 존재하는 한 이 단체는 영속성을 이어갈 것임이 분명하다. 또 북한이 공산당 치하에 넘어감으로써 조직이 와해된 북한 지역 YWCA도 평화통일이 되면 복원될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하나님을 창조와 역사의 주로 믿으며 인류는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자기 삶에 실천함으로써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이 이뤄지는 세상을 건설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단체의 설립목적이 널리 구현되기를 기대한다.

1922년 4월 설립 초기부터 계몽사업과 생활개선운동에 주력한 한국YWCA연합회(당시 조선YWCA연합회)는 일제 수탈이 극심하던 1938년 일본YWCA로 강제 통합됐다가 1940년대 초반 문을 닫는 수난의 역사를 딛고 1946년 3월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후 전후재건과 도약의 시대를 거쳐 여성인권보호, 여성능력실현, 자원봉사확산, 평화구현, 생명존중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45년간 한국YWCA연합회에서 헌신한 차경애(68) 회장을 만나 이 단체의 활동상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여성 기독 단체에서 반평생을 보내고 계신데.

“기독교 집안의 영향을 받았어요. 아버지(차경창)가 감리교단의 목사님이셨거든요.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지역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때 옥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셨어요. 출옥하신 뒤 감리교신학대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님이 되셨죠. 어머니도 같은 학교를 졸업하셨고요.”

-아버지가 목회 활동을 하신 교회는(차 회장은 질문을 받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말문을 이었다).

“6·25전쟁이 터진 1950년 인민군에 피랍되셨습니다. 서울 수표동에 있던 수표교교회(서울 서초동으로 이전) 담임목사로 계실 때였죠. 감리교단의 목사님들 10여분과 함께 납치됐습니다. 그 후론 연락이 끊겨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감리교단에서는 6·25전쟁 때 피랍된 목사님들과 함께 순교하신 것으로 교회사를 정리했습니다. 인천 옹진군 덕적도에서 태어나셨는데, 그곳에 아버지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이화여대 신문학과에 진학하셨는데, 당시만 해도 신문학은 생소한 학문이었을 텐데.

“3회 졸업생인데, 신학문이었죠.”

-대학과 학과를 결정한 이유는.

“기독 여성으로서 기독 대학교를 택한 거죠. 학과는 인텔리였던 형부가 추천해주셨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 잘한 선택이었어요.”

-신문학과를 졸업하면 외국 유학을 가서 교수가 되든지, 보통 언론인의 길을 걷지 않나요.

“아버지가 순교하셔서 경제적으로 외국 갈 형편은 안 됐어요. 한 언론사에 응시했다가 낙방했는데…. 제 길이 아닌 듯했어요. 대학 4학년 때 감리교단에서 발행한 주간지에서 1년간 기자로 활동한 적은 있어요. 그때 취재하러 Y에 오곤 했어요(차 회장은 한국YWCA연합회를 줄여서 Y라고 했다).”

-그런 인연으로 한국YWCA연합회에 몸을 담았군요.

“대학에서 연락이 왔어요. Y에서 사람을 찾는다고. 졸업한 이듬해인 1967년 3월부터 출판 업무를 맡았고, 그해 4월 정식으로 채용됐죠. 벌써 45년이 지났네요. 당시 Y 신입 직원의 월급이 일반 기업체의 절반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Y에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어요. 사람이 바르게 성장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깨달은 거죠. 그것이 가장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활동하시면서 가장 보람된 일은.

“1988년부터 직업훈련 분야의 간사를 맡았는데, 여성들에게 다양한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데 일조한 것이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Y의 직업훈련은 창설 때부터 시작됐다고 보면 됩니다. 제가 간사일 때에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겼던 도배, 타일, 페인트 분야에까지 여성들을 훈련시켜 현장에 투입했습니다. 여성 임금이 남성 임금의 40% 정도에 불과하던 것을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올려놓았죠. Y의 직업훈련 분야의 업적은 고용노동부도 인정할 정도입니다. 현재 단기 직업훈련을 시키는 전국 여성인력개발센터 50곳 가운데 Y가 26개를 운영하고 있으니까요.”

-군사정권 시절에 한국YWCA연합회가 한 일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365일 철야기도회를 한 것입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위기 국면에서 대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죠. 더 이상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사회상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한 Y가 1987년 6월 1일부터 이듬해 5월 31일까지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이 기도회를 계기로 Y 회원들 간의 유대가 더욱 돈독해지고 영성이 강화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올해로 설립 90주년을 맞았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죠.

“기업체나 시민사회단체나 90주년을 맞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45년간 Y에서 일을 했고, 지금은 회장을 맡아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90주년은 100주년을 준비하는 기간의 출발선입니다. 지난 18일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에서 전국 4500여명의 회원이 모여 100주년을 향한 비전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회원이 많이 모였는데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아홉 살인 어린이 회원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엄마 따라서 행사에 왔는데 너무 좋았어요. 10년 후에 100주년 행사할 때면 제가 열아홉 살이 되는데 그때 꼭 다시 만나요. 그동안에는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어른들이 만들어 주세요.’ 그 어린이의 말처럼 어른들의 책임이 무겁다고 생각합니다.”

-한국YWCA연합회를 빛낸 분들을 꼽는다면

“하도 많아서…. (차 회장은 망설이다가 몇 분만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자 입을 열었다) 창설자이신 김활란 김필례 유각경 선생을 들 수 있죠. 여성 선각자인 이들은 계몽, 교육, 생활개선, 여권신장, 민족운동 등에 헌신했어요. 당시 여성들을 괴롭히던 조혼·공창제 폐지와 축첩제 반대를 위해 노력했고, 물산장려운동에도 앞장섰죠. 고문총무를 맡으신 박에스더 선생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분은 아기일 때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가 세계YWCA가 1947년 한국에 고문총무로 파견한 분입니다. 뒤에서 궂은일을 도맡았죠. 연합회 건물과 경기도 부천에 청소년교육훈련장을 지을 때 미국 등 해외 모금활동을 주도했습니다. Y의 운동방향을 정하고 탈북자돕기에 헌신한 주선애 전 회장, 여성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한 이태형 박사, 총무(현 사무총장) 출신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김숙희 전 회장, 광주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한 조아라 전 광주YWCA 회장이 있습니다(차 회장은 몇 분을 더 소개했다).”

-한 조직의 리더신데, 리더의 자격을 말씀해주시죠.

“비전과 비전을 이룰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균형감각과 통찰력도 갖춰야 하고요. 인내심을 갖고 함께 일하는 리더십, 남을 높여주는 리더십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북한에도 YWCA 조직이 있었죠.

“평양 함흥 원산 등 5개 도시에 지역 조직이 있었습니다. 통일이 되면 반드시 조직을 복원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기금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여성 대통령이나 여성 총리가 국정을 이끄는 나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여성 대통령 후보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결정됐고요. 여성운동을 하는 조직의 회장으로서 여성 대통령 후보를 어떻게 보고 계신지.

“(차 회장은 손사래를 치면서 입장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회원이 10만명가량 됩니다. 지역, 나이, 학력, 정치관, 세계관 등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시민단체입니다.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Y는 항상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예를 하나 들죠. 과거 여권 실세의 부인이 회장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도 Y에 출근하셔서는 정치의 ‘정’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리면 Y는 100주년을 맞이할 10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생명존중의 세상, 정의와 평화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느리더라도 반드시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입니다.”

만난 사람=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