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하나님에게 몰빵한 천재적 수학자 파스칼 (下·끝)
입력 2012-08-27 17:56
종교적 진리에 늘 목말랐던 파스칼 세속적 성공 쫓다 하나님과 만나다
파스칼은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교유했으며, 그 자신 최고의 천재 수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종교적 진리에 목말라 했다. 종교적 분위기가 지배하는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청년이 되어서부터였다. 1646년 정월 아버지가 낙마한 것이 계기가 됐다. 낙마로 다친 아버지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두 명의 의사가 머물게 됐다. 그들은 치료뿐만 아니라 파스칼 가족에게 얀센과 아르노 등 신학자들을 소개해 주고 얀센주의 교리도 전달해주었다. 그들의 정성과 교리에 감동해서 파스칼 가족은 얀센주의에 귀의했다. 파스칼이 가장 열성적이었다. 심한 병 때문에 하반신이 거의 마비됐던 파스칼은 종교를 통해 자신의 괴로움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는 병 때문에 18살 이후 하루도 고통이 없는 날을 보낸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종교에 귀의하고 나서 오히려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렸다. 병을 통해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기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얀센주의는 벨기에 루뱅대학교의 신학자 얀센(C. O. Jansen, 1585∼1638)이 주창한 교의이다. 그는 예수회 신부 몰리나(Luis de Molina, 1535∼1600)에 반대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순수한 교리를 엄격하게 고수했다. 몰리나는 칼뱅을 비판하기 위해 ‘자유의사와 은총’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에서 성례와 기도와 덕행의 실천을 통해서도 은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얀센은 인간은 ‘원죄’에 의해 철저하게 타락했고, 따라서 죄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그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얀센주의는 칼뱅의 교리와 흡사했다. 당시 가톨릭이 지배하던 프랑스에서 얀센주의는 신학적으로 개신교에 가장 근접한 교리였다. 1653년 몰리나 신부 측은 얀센의 저서를 이단으로 공격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은총과 인간 의지의 관계에 대한 얀센의 다섯 가지 명제를 단죄했다. 얀센주의자인 파리 소르본 대학교 교수 아르노(Antoine Arnauld, 1612?1694)는 얀센의 저서 속에는 그런 명제가 없다며 반박했다. 반박의 대가로 아르노는 심한 견책을 받았다. 아르노의 부탁을 받고 파스칼은 1657년에 루이 드 몽타르트라는 익명으로 예수회를 공격하는 18편의 서한을 썼다.
얀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이 서한집이 그 유명한 ‘프로뱅시알’, 즉 ‘시골친구 앞으로 보내는 편지’이다. 그는 이 서한집에서 얀센주의의 입장에서 은총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는 입장을 옹호했다. 논리적 엄격함과 감동적인 문체를 지닌 파스칼의 이 작품은 대중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파스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르노는 소르본 대학에서 축출당했다.
파스칼은 얀센주의에 귀의했지만, 한동안 사교계의 방탕아이자 세속적 성공을 열망한 세속인으로 지낸 적이 있었다. 1651년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종교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누이동생 자클린느가 전 재산을 수도원에 기증하려 하자 맹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파스칼은 파리의 유명한 살롱들을 출입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그는 살롱에 출입하는 귀족들에게서 세련된 매너와 남을 기쁘게 하는 기술도 배웠다. 귀족과 같은 세련된 매너와 다양한 방면의 지식을 지닌 파스칼은 곧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그의 곁에는 항상 아름다운 여인들이 맴돌았다. 그는 향락적인 생활을 추구하며, 세속적 행복에 탐닉했다. 어떤 여성과 만나서는 결혼할 생각까지 했다. 그는 종교적 가르침 대신 몽테뉴나 에픽테토스와 같은 스토아철학자들에게서 세속적 성공을 위한 생활의 지혜를 추구했다. 그러나 철저한 세속적 삶을 살던 파스칼은 결정적인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된다.
파스칼의 유명한 종교적 회심과 각성의 체험은 1654년 11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밤에 일어났다. 육체적인 떨림을 동반한 이 체험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파스칼이 그때의 체험을 메모지에 기록해 놓았다. 그는 그 체험을 잊지 않기 위해 외투 안감에다 그 메모지를 꿰매어 놓고 항상 지니고 다녔다. 이 메모는 그가 죽은 다음에야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불. 철학자와 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복음이 가르치는 바의 방식으로만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파스칼은 그가 찾던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사교계를 떠나 다시 온전히 종교적 삶을 영위하고자 포르 루아얄 수도원 근처로 간다. 이 수도원은 얀센주의의 중심지였다. 이 수도원은 원래 순수한 여성수도원이기에, 남자들은 수도원의 주변에 머물며 생활을 해야 했다.
파스칼은 엄격한 수도원 생활을 지켰고,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고행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예수회에 대해 얀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앞서 언급한 ‘프로뱅시알’을 써서 발표했다. 이 작품이 나온 뒤 그는 교회 당국에 체포당하지 않기 위해 수시로 이름을 바꾸고 거처를 옮겨 다녀야만 했다. 그는 ‘프로뱅시알’에 이어 본격적으로 자신의 신앙관을 담은 ‘기독교 신앙의 변증론’을 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흔적들은 파스칼이 죽은 뒤 출간된 ‘팡세’에 포함돼 있다. ‘팡세’는 그가 남긴 글들, 격언, 노트, 작은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 ‘팡세’는 이성의 요구와 기독교적 신앙 사이에 벌어진 파스칼의 정신적 고투를 보여준다.
원래 몸이 좋지 않았던 파스칼은 말년에 벌어진 예수회와 얀센파 사이의 논쟁으로 몸 상태가 더욱 악화됐다. 교회 당국은 1661년 얀센을 이단으로 인정하라는 신앙선서문에 전 성직자가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파스칼의 누이동생 자클린느를 포함해 포르 루아얄의 수녀들은 그 서명에 반대했다. 처음에 서명에 반대했던 얀센파의 아르노 신부까지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파스칼은 끝까지 반대했다.
파스칼은 1662년 8월 19일에 불과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자기가 살던 집을 한 병든 아이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누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그는 “이 병든 아이를 옮기기보다는 나를 옮기는 것이 덜 위험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임종의 병상에서 가난한 사람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참회했다.
파스칼의 삶은 강렬하게 타오른 불꽃이었다. 그러나 그 불꽃은 너무 짧았다. 짧은 생애 동안 파스칼은 천재적 재능으로 물리학, 수학, 인문학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과학적 진리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기에 그는 짧은 생애동안 내내 불안했다. 그 불안이 그를 학자에서 사교계의 총아로 그리고 종교적 금욕주의자로 방황케 했다. 그는 인간의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종교적 체험으로 알았다.
그러나 은총은 순전히 하나님의 영역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에 의한 은총을 끝까지 기대하는 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기를”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