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안녕하십니까-(1부) 비상등 켜진 개인의 정신세계] (6) ‘공포의 기억’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입력 2012-08-26 18:44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 조기 치료가 삶 황폐화 막는다

#1. 김모(54)씨는 1년 전 건설현장에서 지붕 붕괴 사고를 겪은 이후로는 큰 건물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지붕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집안에서도 못 자고 바깥에 텐트를 치고 잠잔다. 매일 술에 절어 지내다보니 ‘알코올 중독’ 수준에 이를 정도가 됐다. 이달 초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하지만 답답한 병실을 견디지 못하고 며칠 만에 퇴원하고 말았다.

#2. 안모(33·여)씨는 어릴 적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때리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자신 또한 심한 신체적 학대를 받았다. 이후 초인종 소리만 들어도 ‘아버지가 행패를 부리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떨치지 못했다. 4년 전부터 PTSD 치료를 받으며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안씨는 연락을 하지 않던 아버지가 최근 술을 먹고 찾아오면서 다시금 ‘악몽’이 되살아났고 정신과병동에 입원했다.

#3. 중학생 이모(16)양은 올해 초 같은 반 친구 5명에 의해 학교 화장실로 끌려가 상의가 강제로 벗겨진 채 따귀를 맞고 주먹질을 당했다. 친구들은 자신들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고 다닌다며 이양을 ‘왕따’시켰다. 배신감과 수치심에 큰 충격을 받은 이양은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한 차례 자살시도까지 했다. 이양은 6개월째 약물과 상담 치료를 받고 있지만 학교를 그만두는 상황이 됐다.

흔히들 ‘시간이 약’이라고 한다. 아무리 아픈 마음의 상처도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고 아물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PTSD 환자들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시간’일 뿐이다. PTSD는 전쟁이나 사고, 재난, 폭력, ‘묻지마’ 범죄 등 생명을 위협하는 충격적 경험 뒤 겪게 되는 정신적 후유장애다. 정신의학 용어로 ‘트라우마(Trauma)’라고 한다. 큰 사건을 겪은 뒤 꿈이나 반복되는 생각을 통해 끔찍한 장면을 재경험하거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특정 물건·상황을 회피하고 불안·우울·분노·공포·무기력감 등의 증상이 최소 1개월 이상 지속되면 PTSD로 진단한다.

자연재해와 인위적 재난, 각종 사회범죄가 빈발하면서 PTSD를 겪는 이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26일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PTSD 진료 환자는 2007년 5443명, 2008년 5577명, 2009년 5877명, 2010년 6104명, 2011년 6357명으로 계속 증가 추세다. 올 초 발표된 보건복지부 2011 정신건강실태조사 결과 한국민의 PTSD 평생 유병률은 남성 1.0%, 여성 2.2%였다. 남성 100명 중 1명, 여성 100명 중 2명은 평생 한번 PTSD에 걸린다는 뜻이다.

가천의대 정신건강의학과 조인희 교수는 “요즘엔 가정폭력, 학대, 성폭력, 학교폭력 등으로 인한 만성적이고 복합적인 PTSD 환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직접적인 사고 피해자는 아니지만 사고나 범죄 현장을 목격한 이들의 ‘간접 트라우마’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실제 지난 22일 발생한 ‘여의도 칼부림’ 사건 현장을 지켜본 일부 시민들은 ‘섬뜩하다. 바깥에 다니기 겁난다’ 등의 PTSD 증상을 호소하고 있다.

PTSD의 심각성은 조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개인의 삶이 송두리째 황폐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PTSD 환자 50% 이상이 우울증, 불면증, 알코올중독, 사회부적응, 대인관계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들 중 20%는 자살을 시도한다는 보고도 있다.

한양대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대호 교수는 “PTSD를 ‘정신력이 약하다’며 개인 문제로 치부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신과 진료에 대한 편견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치료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