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적극적 영성
입력 2012-08-26 18:00
일본의 작가이자 기독교 지성이었던 미후라 아야코는 이런 말을 남겼다. “죽는 것은 이제 내게 남은 마지막 사명이다.” 나는 이 한마디 때문에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의 깊은 영성을 충분히 짐작케 하는 한마디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마지못해 받아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잔’이 아니었다. 죽음이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그의 마지막 헌신의 기회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엄청난 능동성과 적극성이다. 이것이 그의 영성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모든 인생의 순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심지어 죽음조차 넋 놓고 앉아서 맞는 수동적 자세를 거부했던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의 영성은 적극성과 능동성으로 나타나야 한다. 어떤 수련회에서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한 학생이 앞서 대표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우리가 결단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표현했다. 나는 즉시 그 기도를 교정하고 싶었다. “하나님 우리가 결단하겠습니다.” 그렇다. 내가 결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드러누워서 모든 것을 다 해달라는 것인가?
물론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인생의 주인이 교체되는 것이므로 구원받은 즉시 우리는 수동적인 자세가 자연스럽다. 즉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므로 나는 그저 주인의 손에 이끌림을 받겠다는 자세다.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선 안 된다.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붙들고 따라가지만 어느 순간 부모의 손을 놓고 부모가 옆에 계심을 믿으면서 당당히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주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주인 안에 있지만 ‘수동적 순종’이 아닌 ‘능동적 순종’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지각을 사용하여 생각하고 고민하며 주인의 뜻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쫓아가는 것이다. 성숙할수록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영성은 줄어들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영성은 개발된다.
‘연탄길‘의 작가 이철환씨 간증이다. 한때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시절, 그의 아내는 남편을 위해 새벽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가는데 한 중풍 환자가 교회를 향해 너무 힘들게 걸어가고 있더란다.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가만히 보니까, 이 노인은 힘겹게 한발을 떼고서는 하늘을 향해 ‘아버지 힘 주세요’ 그리고 또 힘겨운 한걸음을 떼고서는 ‘아버지 힘 주세요’ 떨리는 기도를 하며 사력을 다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내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철환씨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자세를 기대하시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물론 힘들겠지만 무력하게 드러누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 주시기 전에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우리가 말할 때 이것이 기특한 믿음의 고백일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얄미운, 어린아이 같은 고백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기독교 영성의 꽃은 능동성과 적극성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박지웅 목사(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