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380m, 위험으로부터의 거리
입력 2012-08-26 20:38
그곳은 내 일상의 동선이 그리는 아주 작은 동그라미의 안쪽에 있다. 지리적 거리만 가까운 게 아니었다. 오후 7시16분은 절묘한 시간이다.
‘19시16분’이란 숫자는 저녁식사 시간의 중앙을 관통한다. 만약 그날 “밥 먹으러 가자”며 일어섰을 때 휴대전화가 울리지 않았다면, 길어진 통화 때문에 건물 내 지하식당 대신 늘 가던 골목어귀까지 무심히 걸어갔다면, 평소보다 식사를 마친 시간이 조금 빠르거나 늦었더라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숫돌에 갈았다’는 과도에 찔린 건 어쩌면 내가 됐을지 모른다.
지난 22일 발생한 ‘여의도 칼부림’ 사건의 현장까지는 국민일보 본사 사옥에서 약 380m, 걸어서 3∼4분 거리다. 찻길 너머 국회의사당, 대각선 모퉁이에 새누리당 당사가 위치해 있고 밥집과 커피숍이 즐비한 교차로는 서여의도 직장인들에게는 이를테면 광화문네거리 같은 장소였다.
평일 저녁마다 일대는 생활의 소음과 하루의 피로, 퇴근길 활기가 뒤엉켜 술렁대곤 했다. 어느 실직자의 흉기가 일상의 풍경을 유혈극으로 바꿔놓은 뒤에야 우리는 깨달았다. 위험은 믿었던 것만큼 멀리 있지 않았다.
이견은 있겠으나 시민 다수에게 대한민국은 비교적 안전한 나라였다. 인구 10만명당 살인사건 사망자 수는 약 2.6명(2010년)으로 미국 5.9명의 절반에 불과하다. 체감도 다르지 않다. 서울은 전 세계 메가시티 중 해가 진 뒤 도심을 활보할 수 있는 드문 도시다.
한밤중 서울 지하철에서 취객과 부딪친대도 불쾌감 대신 공포를 느낄 이유는 없다. 범죄에는 늘 개인적 인과가 있었고, 조심하면 위험은 피할 수 있는 듯 보였다. 여의도 칼부림은 이런 안전신화의 허점을 폭로했다.
김씨는 왜 칼을 휘둘렀을까. 우리에겐 답이 없다. 그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악인이거나 정신과적 환자, 혹은 스스로의 주장처럼 ‘직장 왕따’의 희생자일수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현재까지 그의 삶에서 자신이 휘두른 폭력의 수준에 상응하는 개인적 원한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분출한 분노의 대상과 피해자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남는 건 모호한 정황뿐이다. 김씨는 경쟁에서 밀려났고 벼랑 끝에 몰린 채 절망했다. 그리고 절망을 양분으로 범죄자가 됐다.
우리 사회에는 김씨와 같은 원인미상의 위험이 얼마나 자라고 있는 걸까. 여기 약간의 힌트가 있다. 자살률이다. 자살은 살인과 정반대 행동처럼 보이지만 실은 비슷한 구석이 많다. 절망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하규섭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어떤 살인은 자살과 심리적 기제가 비슷하다”며 “생존을 위한 방법이 다 실패하고 절망했을 때 어떤 이는 자살로 자신을, 또 어떤 이는 살인으로 타인을 파괴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다. 절망한 사람들이 한 해 1만5000명 넘게 목숨을 끊는다.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난다.
김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혼자 죽기 억울해서” 살인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그를 자살 대신 살인미수로 내몬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저 자살과 살인 사이를 오가고 있을 더 많은 김씨를 짐작해볼 뿐이다.
불길한 상상을 보탠다. 만약 높은 자살률이 극단적 불행만이 아니라 들끓는 분노도 암시하는 것이라면? 절망한 이들이 ‘나’ 대신 ‘남’을 해치기 시작했다면? 위험으로부터 우리는 대체 얼마나 떨어져 살고 있는 걸까.
이영미 경제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