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경집] 포도밭 주인은 왜 그랬을까

입력 2012-08-26 20:39


성서에서 ‘포도밭 일꾼과 품삯’의 비유를 읽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일꾼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다. 그런데 아침 일찍부터 일했거나, 낮에 왔거나 심지어 오후 늦게 온 일꾼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일찍 온 일꾼이 항의했다.

그런데 주인은 생뚱맞게 품삯은 자기가 정한 것인데 왜 시비냐고 면박을 준다. 그 포도밭 주인 또라이 아냐?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흔히 사람들은 이 비유를 일찍 교회 다녔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다 깊은 속뜻이 있다. 1데나리온은 은화 3.8g 정도로 통상 하루 품삯이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최저생계비쯤 되겠다.

최소한의 배려가 없는 사회

포도밭 주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오후 늦게 와서 고작 두세 시간 일한 일꾼에게 1데나리온 품삯 주는 게 아까울 수 있다. 그러나 늦게 온 일꾼은 게을러서 늦은 게 아니다. 일찍 나왔는데 불운하게 일자리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늦은 오후에 그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돈 벌어올 자기만 기다릴 가족 생각에 그는 침이 바짝 말랐을 것이다. 바로 그때 포도밭 주인이 그를 데려갔다. 포도밭 주인은 그가 꼭 필요했을까? 아닐 것이다.

일손이 더 필요했다면 일찌감치 데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낮에 선택되지 못하고 망연자실 바라보던 일꾼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그래서 늦은 오후 혹시나 싶어 나가봤다가 데려온 것이다. 포도밭 주인이 자선사업가는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사람에 대한 배려와 애정은 지녔던 모양이다. 일찍 온 일꾼은 억울할지 모르지만 그는 일자리를 얻었다는 안도감을 누리지 않았는가.

신문에 난 한 장의 사진이 오랫동안 눈에 밟혔다. 노동자들과 용역들의 대치. 얼핏 보면 약자와 강자의 대치 같지만 사실은 똑같이 힘없고 서러운 삶을 지탱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왜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가. 약한 것들끼리 싸우게 하는 것은 야비하다. 공권력에 버금가는 장비로 무장한 용역은 강해 보인다. 그러나 방패 뒤에 숨어 조정하는 자만 배부를 뿐 그들도 겨우 일당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건 노동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자는 뒤에 숨어 팔짱 끼고 없는 것들끼리 삿대질하게 만드는 것만큼 비겁한 건 없다. 그게 야만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혜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누리지 못했던 엄한 시민들이 장롱에 보관했던 금붙이며 손가락의 반지까지 뽑아 위기를 극복하는 동안 책임자들은 오히려 더 큰 이익을 탐하다가 위기가 가라앉자 태연하게 돌아와 자기네 아니었으면 위기 극복 못했을 거라며 눙치던 모습을 기억하는가. 비겁하고 무책임한 자들이다.

탐욕의 물음부터 거둬들이자

기업도 나름대로 어려운 점 있을 것이고, 노동자들도 제각각 야속한 것 많을 것이다. 그런데 서로 대화하고 또 대화하고, 이해하고 더 이해하는 노력과 절차는 대충 생략하고 다짜고짜 대립하는 것도 이젠 지겨운 풍경이지만, 그 사진은 정말 아니다. 우리 사회는 늘 그랬다고, 자초한 일이라고 체념할 사안이 아니다. 진지하게 무릎을 맞대고 몇 날이고 몇 번이건 따지고 품고 소통해야 한다. 그걸 불필요한 비용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다. ‘너’가 무너지면 ‘나’도 없다. ‘우리’라는 연대감은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의 이분법으로 구획하는 한 결코 생길 수 없다. 그 연대감이 사라질 때 사회는 아무 희망도 없어질 것이다.

늦은 오후에 데려온 일꾼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었던 포도밭 주인의 비유의 참뜻을 헤아려야겠다. 이 땅에 1000만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있다는데 도대체 그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노동자와 용역이 대치하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 신은 뭐라 말할까? “그 포도밭 주인 또라이 아냐?” 그런 탐욕의 물음부터 거둬들이자. 겸손하게.

김경집(인문학자·전 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