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주연] 세월의 향기

입력 2012-08-26 20:35


요즘 아파트는 세탁기, 가스레인지, 책장 등 살림살이가 빌트인으로 들어 있고, 공공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심지어 물놀이 시설이 있는 아파트도 등장했다. 평생 새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그동안 살던 아파트 모두 내 나이보다도 많을 것이다. 덕분에 대부분 시간을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 했기에 지금의 집으로 이사왔을 때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출세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오래된 아파트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외관이 허름할 뿐 아니라 수시로 수리할 곳이 생긴다. 새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그 쾌적함에 놀랐다. 이렇게 편하게 사는 방법이 있구나, 부러웠다. 오래된 것에 대한 불만이 멋스러움으로 느껴지게 된 것은 전 총지배인 슈미트씨 덕분이다. 그의 고향 빈은 2000년 역사에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다. 450년 된 그의 아파트가 일반적일 정도로 모든 건물이 역사를 품고 있다. 이를 보존하기 위해 시내에 자동차, 화려한 간판 등을 규제해 유유히 걸으며 역사를 즐기기에 좋다고 자랑했다.

그의 집도 근무했던 여러 나라의 앤티크 가구와 유럽 디자인이 어우러져 우아하고 개성이 넘쳤다. 근무지로 우리 호텔을 선택한 것도 100년 가까운 역사 때문이라고 하면서 한국은 새 아파트밖에 없는 것을 신기해했다.

한 지인은 이탈리아에서 오래된 건물을 리뉴얼하는 것을 배워왔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0∼30년이면 부수고 새롭게 짓기 때문에 유학 때 배운 것이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재개발만 하면 100년 후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 2012년 서울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기 어렵지 않을까. 상상해보니 우리가 존재하는 이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 한 모임이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가운데 천재 시인 이상이 젊은 시절에 살던 집 앞에서 공연 한판이 벌어졌다. 한상원 밴드가 연주하는 ‘수지 큐’에 신나게 박수 치고, 모로코 음악가의 연주에 맞춘 프랑스 무용가의 춤에 감탄했다. 작고 허름했지만 운치가 있었다. 인근의 통의동 보안여관은 1930년에 문을 열어 나그네의 휴식처였던 곳인데, 요즘에는 문화예술 행사 혹은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옛 건축물을 보전하고 새롭게 활용하는 모습이 반갑다. 이렇게 건축물에 세월에 향기가 배어 가는 동안 우리도 100년 후를 기약하게 되리라.

안주연(웨스틴조선 호텔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