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잔치 판 깨라”… 美대선 무너진 신사협정
입력 2012-08-24 19:19
미국 정치에서 한 정당의 전당대회 기간 다른 당은 선거 운동을 자제하는 게 관례였다. 정·부통령 후보자는 유세를 중단하거나 선거운동을 하더라도 언론 노출도가 적은 사적 모임을 갖곤 했다. 명문화되지 않은 ‘신사들의 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관습이 이번 대선에서 철저히 무너지고 있다. 백악관은 23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경합주(스윙스테이트)인 아이오와, 콜로라도, 버지니아 등 3개 주에서 28∼29일 이틀간 선거 유세를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 기간은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공화당 전당대회(27∼30일)가 한창인 시점이다.
오바마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도 CBS방송의 간판 심야토크쇼 프로그램인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29일 출연한다.
압권은 조 바이든 부통령이다. 그는 공화당 전당대회가 개막하는 날과 그 다음날 ‘잔치’가 열리는 탬파에서 선거 유세를 할 예정이다. 제임스 클라이번 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 데비 와스먼 슐츠 의원(플로리다) 등 하원의 민주당 거물들도 ‘잔칫집 판 깨기’에 동참한다. 탬파시를 관할하는 힐스보로 카운티의 데이비드 지 보안관은 “전당대회 치안 유지에도 비상이 걸린 상황”이라며 “상대 정당이 전당대회를 여는 곳에 현직 부통령이 불쑥 나타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선거구가 탬파인 민주당 소속 케이시 캐스터 하원의원은 “전국에서 엄청나게 많은 취재진이 몰리는 만큼 우리는 아주 활발한 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이 언론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이러한 행보에 나선 이유는 명확하다. 밋 롬니 대통령 후보의 세금 납부 의혹과 토드 아킨(미주리주) 의원의 강간 관련 발언으로 곤경에 처한 공화당이 일주일간이나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할 기회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판단이다.
로스 베이커 럿거스대 정치학과 교수는 “신사협정이 파기된 것은 주로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미국 정치의 양극화 때문이지만 이 관습이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진기한 에티켓’이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줄리언 젤리저 프린스턴대 교수도 “가능하면 최대의 메시지를, 가장 많은 장소에 노출시켜야 하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며 “전당대회가 미디어 홍보전으로 전락한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변화”라고 지적했다.
공화당도 민주당이 9월 초 전당대회를 여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 상황실을 설치하는 등 민주당의 미디어 독식을 차단하기 위한 방안을 궁리 중이다. 의회전문지인 힐은 그러나 공화당은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 폴 라이언 부통령 후보가 샬럿에서 선거 유세를 할지 여부를 포함한 대응책 공개를 극히 꺼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