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이순신-⑧ 사랑론] 결혼, 삶의 진로를 틀다
입력 2012-08-24 18:49
칠월칠석은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 만나는 날이다. 연인의 날이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결혼을 하지만 조선 시대 양반들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 목적이었다. 젊은 양반 남녀는 자신들과 관계없이 부모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맺어 준 결혼을 해야 했다. 게다가 유교 윤리와 체면 때문에 서로 소원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양반 남성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맺는 소실을 얻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이순신도 당시 양반 남성들처럼 상주 방씨와 결혼한 뒤 두 명의 첩을 두었다. 족보에 기록된 해주 오씨, 일기에 나오는 부안댁이 그들이다. 또 김훈의 ‘칼의 노래’에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여진이라는 여인도 있지만 첩은 아니다.
이순신에게 결혼은 인생의 진로를 바꿀 특별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본래 어렸을 때부터 전쟁놀이를 즐겼고 힘도 남달리 센 인물이었지만, 명문 문인가 출신이었기에 결혼 전에는 문과 공부를 했었다. 그런 그가 무인 가문의 방씨와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적성에 맞는 무과를 선택할 기회를 얻었다. 특히 장인 방진은 궁술과 병법에 탁월했던 인물이고, 방씨 부인 역시 무인집안의 여장부였기에 이순신의 무과 도전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순신에게 방씨는 여우같은 마누라이기보다 함께 꿈꾸는 친구이자 동료였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은 아들들을 통해 아산 본가에 있던 방씨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다녀오지는 못했다. 부하들은 휴가를 보내 가족을 만나게 했으면서도 자신은 한산도에서 가까운 여수 고음천에 피난 온 어머니를 찾아뵙겠다고 체찰사 이원익에게 휴가 청원 편지를 쓸 정도로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방씨가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잠을 설치며 걱정했을 뿐더러 점까지 칠 정도였다. 겉은 차가운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만은 뜨거운 사나이였다.
영웅호색이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여자 문제도 깨끗했다. 진중에 있을 때는 늘 긴장해 허리띠를 풀지 않고 지내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때문에 꿈속에서조차 “유혹하는 미인의 손짓을 뿌리쳤다(1594년 2월 5일)”고 할 정도로 엄격했다. 결혼은 이순신과 방씨 부인의 관계처럼 서로를 완성시키는 것이고, 신뢰 없이는 오래 갈 수 없다. 하루살이 같은 애인들보다 백년의 고락을 함께하는 사랑이 소중하다.
박종평(역사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