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고승욱] 가을장마
입력 2012-08-23 19:45
2007년에는 가을장마가 20일 가까이 이어졌다. 장마전선이 오르내리며 비를 뿌려 농작물 피해가 속출했다. 논에는 깜부기병이 돌았고 배와 사과 값이 크게 올랐다. ‘가을장마에 다 된 곡식 썩힌다’는 옛말처럼 추석까지 이어진 비로 사람들의 시름이 깊었다.
기상청은 다음해 1월 서울대에서 공청회를 열었다. 8월 강수량이 장마철인 7월보다 많아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학자들은 “기후변화를 반영해 6∼9월을 우기(雨期)라고 불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2000년대 들어 8월 강수량 증가가 뚜렷한 기상현상으로 굳어졌다는 설명이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장마철 강수량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장마가 끝난 뒤 여름철 강수량은 30% 넘게 늘었다. 날씨가 예전보다 더워졌기 때문이다. 서울은 지난 100년 동안 연평균 기온이 2.4도 높아졌다. 대기가 따뜻해지니 수증기량이 늘고, 비가 많이 온다.
그런데 이 비가 장마철 이후에 집중됐다. 그것도 하루에 50㎜가 넘는 집중호우가 일상화됐다. “장마가 끝났습니다”라는 기상청 발표를 듣고 해수욕장으로 간 사람들이 불평을 쏟아냈다. 시간당 20㎜가 넘는 물폭탄을 맞은 수재민들은 난리가 났다.
결국 기상청은 2008년에 장마가 끝나는 시점을 발표하지 않았다. 2009년부터는 아예 장마예보를 하지 않았다. 1961년부터 매년 5월 말 여름철 기상전망과 함께 나왔던 ‘장마예보’는 그렇게 사라졌다. 당연히 가을장마라는 말도 예보에서 없어졌다.
그러나 예보를 안 한다고 가을장마가 사라진 건 아니다. 뜨거운 여름해가 기울면서 북태평양고기압이 수축되고, 북쪽의 차가운 대륙고기압이 슬슬 세력을 넓히는 기압배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대 고기압이 만나면서 만들어진 장마전선은 더위가 끝날 무렵 다시 나타나 약을 올리고 지나간다. 가을장마와 함께 남쪽에서 서해를 타고 올라오는 수증기가 집중적으로 비를 뿌리는 현상도 되풀이되고 있다.
백과사전의 가을장마 항목에는 ‘1026년 가을장마로 민가 80여호가 떠내려갔다는 고려사(高麗史) 기록이 있다’고 적혀 있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한 자연현상인 것이다. 올해도 가을장마가 시작된 지 1주일이 넘었다. 유례없는 폭염과 녹조를 한번에 날려버린 빗소리에 기뻐하던 것도 하루이틀 뿐이었다. 다음주에는 15호 태풍 볼라벤까지 우리나라로 온다니 단단히 준비해야겠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