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태아도 생명권 주체… 낙태 처벌은 합헌”

입력 2012-08-23 21:29


헌법재판소가 낙태 시술을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토록 한 형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임부의 자기결정권’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더 존중돼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1953년 형법 제정 때 낙태죄 조항이 생긴 이후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8명(1명은 공석) 중 4명이 위헌 의견을 내는 등 찬반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태아도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헌재는 23일 조산사인 송모(58·여)씨가 “낙태를 금지하고, 낙태 시술자를 징역에 처하도록 한 형법 조항은 임부(妊婦)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4(합헌) 대 4(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형법 269조 1항(자기낙태죄), 270조 1항(의사 등의 낙태)은 여성이 스스로 낙태할 경우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 의사·조산사 등이 낙태 시술을 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토록 규정하고 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생명에 대한 권리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며 “태아가 비록 생명 유지를 위해 모(母)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 의학 발전으로 태아의 생존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데다 태아마다 성장 속도가 다르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임신 후 몇 주가 지났는지 또는 생물학적 분화 단계를 기준으로 보호 정도를 달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헌재는 낙태가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해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어 “사회적·경제적 이유로까지 낙태 허용 사유를 넓히면 자칫 자기낙태죄 조항은 사문화되고 인간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가 확산될 우려마저 없지 않다”고 했다.

◇재판관 4명, “위헌”=그러나 이강국·이동흡·목영준·송두환 재판관은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적, 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은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며 위헌 의견을 냈다. 이들은 “불법 낙태로 임부의 건강이나 생명에 위험이 초래되는 사례가 빈발하는 현실에 비춰보면 적어도 임신 초기에는 낙태를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의학계에서 통상 임신 초기(1∼12주)의 태아의 경우 사고나 자아인식, 정신적 능력 등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고, 임신 초기의 낙태는 시술 방법이 간단해 낙태로 인한 합병증이나 모성사망률이 현저히 낮다는 설명이다. 또 낙태죄 규정이 거의 사문화돼 낙태 근절에 큰 기여를 못하고 있는 현실도 근거로 들었다.

◇찬·반 양론 팽팽=한국여성민우회 정슬아 활동가는 “낙태죄 위헌을 주장해 온 것은 낙태죄가 아기를 낳아서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이번 결정을 계기로 낙태와 임신중절 재생산권 논의가 공론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반면 낙태반대운동연합 최정윤 사무처장은 “생명 원칙에 맞는 당연한 결정”이라며 “뱃속의 태아를 심리적인, 혹은 사회·경제적 이유로 죽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10년 기준 낙태죄 위반으로 78명이 입건돼 이 중 12명이 불구속 기소 혹은 약식 기소됐다. 구속된 이는 없었다.

지호일 정현수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