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아 두번째 장편소설 ‘리틀 시카고’… 기지촌 열두살 여아의 눈에 비친 세상
입력 2012-08-23 18:31
“우리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세상은 흑백의 풍경이다. 시신경이 활성화되는 생후 사 개월까지. 아기들은 묽디묽은 무채색의 세상을 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은 점차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12쪽)
3년 전 첫 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를 냈을 때 정한아(30·사진)는 “우리가 사는 바깥세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게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자기 안의 세계를 들여다보던 그가 밖으로 나와 쓴 장편이 ‘리틀 시카고’(문학동네)이다. 그만큼 작가의 시신경도 활성화돼 있다.
제목이자 배경인 ‘리틀 시카고’는 미군기지가 있는 경기도 동두천을 연상케 하지만 소설은 기지촌 이야기이면서도 맑고 청량하다. 주인공인 열두 살 선희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사춘기에 접어든 선희는 엄마와 가까웠던 줄리 아줌마, 매일 밤 딸 몰래 공동묘지를 찾아가던 아빠의 입을 통해 엄마의 실체를 알게 된다. 클럽 여급이었던 엄마는 대학생이던 아빠와 사랑에 빠지지만 악독한 클럽 주인 때문에 밤이면 도망치지 못하도록 철창에 갇혔던 동료들이 화재로 죽어가던 장면을 목격한 뒤 삶의 의지를 잃고 만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가장 많은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레스토랑을 하며 기지촌을 떠나지 않는 선희의 아빠로, 증오 대상인 미군에게 식사를 차려주면서 봉사와 화해,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울러 선희는 제 삶의 공동(空洞)을 이미 알고 있는 소녀, 그 빈칸을 채울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소녀이다.
정한아는 건국대 국문과 1학년 때 미군기지 주둔에 반대하는 교내 사진전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소설을 구상하면서 동두천에 있는 클럽에 한 달 동안 웨이트리스로 위장 취업까지 하며 스토리 라인을 만들어간 그가 선택한 에필로그는 선희를 임신한 엄마의 생전 목소리이다.
“네가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네 눈동자는 연한 갈색일까, 검정색일까. 네 아빠처럼 턱에 보조개가 있을까? 거리에 나가면, 너는 아기 오리처럼 곧잘 내 뒤를 쫓아올까. 엄마, 라고 부르는 네 목소리는 어떨까. …그런데 이거 아니? 네가 어떤 모습이든지, 나한테는 최고라는 거.”(230쪽)
정한아는 “언젠가 내가 읽었던 소설과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며 “좋은 소설은 빛과 같은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고 말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