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박순영] 說에 관한 說

입력 2012-08-23 18:49


‘설(說)’이란, 소설이나 학설처럼 일관성 있는 의견 서술과 해설을 말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출처와 근거를 확인할 수 없이 떠돌아다니는 말, 바람결에 들리는 말이란 뜻으로 풍문(風聞) 또는 풍설(風說), 줄여서 ‘설’이라 한다. 그래서 ‘∼설’이라 하면 지금 말을 하는 사람이나 전하는 사람이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뜻이며, 남의 말에 대하여 ‘썰’이라고 된 발음으로 표현하면 상대방의 진실성을 믿을 수 없다는 말투이기도 하다.

요즘 참 ‘설’도 많다. 정치인의 출마설, 사건 관계설, 출생의 비밀설, 임신 출산설에서부터 연예인의 밀애설, 열애설, 결혼설, 결별설, 은퇴설 등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설, 설, 설….

일관성 있는 의견인가 풍문인가

문제는, 그런 무책임한 ‘설’이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하여 순식간에 대량 유포되고 그 결과 개인과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고 만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인기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들과 유력한 정치인들이다.

연예인은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를 좋아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많은 팬들이 있다. 그들에 대한 근거 없는 ‘설’은 그를 사랑하는 대중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 허물이 있다면 묻어 주고, 혹 지난날의 실수가 있다면 설명하고 뉘우칠 기회를 주어야 그 사회를 건강하다 말할 수 있다.

정치인은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로 권력을 얻어 희망과 행복을 주는 지도자들이다. 그러므로 정치인에 대한 무책임한 ‘설’을 말하고 전하는 행위는 그를 지지하는 많은 국민들에 대한 모독을 넘어 테러와 다름이 없다. 정치인 역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헌신하겠다면서 상대 후보와 정당에 대하여 무책임한 설을 유포하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지도자의 자격이 없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지도자는 상대방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춰냄으로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과 신실하게 살아온 인생 역정(歷程)으로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 시인은 “즐거운 날을 보내고 싶으냐, 좋은 일을 보며 오래 살고 싶으냐? 혀를 놀려 악한 말을 말고 입술을 놀려 거짓말을 마라”라고 하였다(시 34:12∼13).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자 베드로는 “주님,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예수께서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남아 있게 한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하자 이 말이 와전되어 “예수께서 요한은 재림 때까지 죽지 않는다고 하셨다”라는 낭설이 두루 퍼지고 말았다. 복음서의 기록자는 이 왜곡된 ‘장수설’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며 정정하고 있다. 그가 죽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는 뜻이었다고(요 21:21∼23).

언론은 근거 없는 ‘설’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말아야 한다. 사실 보도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의 비판적·분석적 사고를 위한 해석과 대응처방으로 설이 아닌 사설과 논설로 상관조정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천박한 사람은 사람을 논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신성한 강단에서 무책임하게 낭설(浪說)을 퍼트리는 일이 없도록 목사는 오직 진리만을 설교해야 한다. 짐 월리스는 “불의에 반대하는 것도 좋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더 좋다. 가장 어렵고 암울한 순간이야말로 생명의 소중함과 신성함을 일깨워 주는 훈훈한 관계를 맺어야 할 때라며 불평만 늘어놓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그린 선지자들처럼 ‘변화와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위대한 사람은 사상을 논하고 평범한 사람은 시사를 논하며 천박한 사람은 사람을 논한다 하지 않았던가?

박순영 장충단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