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칼부림 난동에 맨손으로 맞선 시민들

입력 2012-08-23 18:49

용감한 대응이 ‘묻지마 범죄’ 피해 줄인다

서울 여의도는 한국정치 1번지다.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새누리당과 민주당, 선진당 등 주요 정당들이 서쪽에 집결해 있다. 국회와 각 정당의 당사 앞에는 항상 경찰버스가 배치돼 있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범죄 안전지대라는 이곳에서 그젯밤 끔찍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8일 의정부 전철역, 지난 21일 수원 정자동 사건을 잇는 범죄다.

경찰조사 결과 범인 김모씨는 22일 오후 7시15분쯤 직장 상사였던 김모씨와 부하 여직원이었던 조모씨의 얼굴, 목, 배 등을 찌르고 달아나다 길에서 마주친 행인 2명에게도 흉기를 마구 휘둘렀다. 그는 “무직상태에서 자살하려고 마음먹었으나 혼자 죽으려니 억울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범행동기를 밝혔다. 또 일면식도 없는 행인 2명을 해친 데 대해서는 “마치 날 잡으러 오는 것 같아 흥분한 나머지 찔렀다”고 진술했다.

이번 여의도 사건은 수백 명의 인파가 붐비는 곳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행인의 눈을 피해 저지르는 범죄의 공식을 깬 것이다. 사건 현장 주변은 특급호텔을 비롯해 사무실과 상가, 식당가가 한데 모인 번화가다. 이곳에서 범인은 20여분 동안 반경 50m의 거리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일대를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놀란 시민들의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도로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그러나 흉악범의 활개를 그냥 놔두지 않은 것은 용감한 시민이었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카페의 의자를 던져 범인을 제지했고, 시민 4∼5명이 두 팔을 벌려 진로를 막기도 했다. 칼에 찔린 피해자를 윗옷을 벗어 지혈하면서 119구급차를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특히 이각수(51) 명지대 사회교육원 교수는 범인을 걷어차 넘어뜨린 뒤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어 경찰이 체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범인의 칼부림에 조씨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경찰도 수사 결과 발표 브리핑에서 이례적으로 이각수 김정기 계진성씨 등 실명을 거론하며 “피의자를 검거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나같이 운동한 사람마저 도망가면 많은 시민이 다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만약 경찰이 보상을 해준다면 다친 분들 치료비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종격투기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을 지내고 현재 세계종합격투기연맹 사무총장으로 있는 무예인이다.

최근 1주일 사이 세 차례나 발생한 무차별 흉기난동 사건은 소외계층의 상대적 박탈감과 사회에 대한 불신이 맞물려 나타난 증오범죄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사회 양극화가 커질수록 이같은 범죄는 더욱 빈발할 수도 있다. 경찰은 증오범죄를 막을 근본적인 처방전 마련에 나서야 한다. 더불어 ‘묻지마 범죄’에 대응하는 시민들의 단합된 힘이 피해를 줄이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여의도 사건이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