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을 위한 알기 쉬운 기독교 (50)

입력 2012-08-23 17:49


세상만사 모든 것이 하나님 뜻인가?

■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이 세상에 어찌하여 비극과 고통이 존재합니까.

■ 신앙생활 잘 하는 친구가 얼마전 암으로 죽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뜻인가요.

■ 얼마 전 중국의 쓰촨성에서 큰 지진이 발생하여 수천명이 죽었습니다. 그런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세상만사를 ‘하나님의 뜻’ 또는 ‘하나님의 섭리’로 쉽게 생각해 버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사고는 결과적으로 인간에게는 면책특권을 주고,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게 되지요. 사례를 하나 들어 봅시다. 한 어린이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비탄에 빠져 있는 어린이의 어머니에게 목사님이 이렇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 곁에 두시고 싶어서 빨리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만약 의사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내 아이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논리적 모순이 있지요. 만일 의사가 빨리 와서 그 아이를 살려냈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것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처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함부로 적용돼서는 안 됩니다. 그 어린이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사고를 낸 운전수가 난폭운전을 했든지, 그 어린이가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았든지, 사고지역이 교통사고에 취약한 곳이든지 등 무슨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결국 그 어린이는 인간의 부주의와 사회악의 희생물이 된 것입니다. 여자 초등학생이 괴한에게 납치돼 결국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는 끔직한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묻지마 범죄’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피해를 당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런 모든 비극적 사건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만사에는 우리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불가지론이 있습니다. 이웃나라들에서 벌어진 지진과 해일 등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게 된 것 역시 명확한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동토층이 얇아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심이 지구촌 재앙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뜻이 되는데, 그런 현상을 하나님의 심판 또는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재앙과 사회악 등의 비극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친구가 암으로 죽은 것 역시 결코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이 아닙니다. 본인이 건강관리를 잘못했든지, 유전적 요인이 있었든지, 환경적 요인이 있었겠지요. 그것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므로,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전 6: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몸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관리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고통이 없는 세상을 원하십니다. 사고도 없고, 범죄도 없고, 병자도 없고, 공해도 없고, 전쟁도 없고, 죄와 악이 없는 세상! 눈물도 한숨도 없는 세상을 원하십니다. 모든 인류가 행복을 누리며 건강하고 기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극히 적은 사람 중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 18: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적 상황에 처한 인간이 절망의 나락에서 하나님의 손을 붙잡을 때 우리 하나님은 화를 복으로 바꿔주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롬 8:28). 비록 인간의 잘못과 실수와 악한 환경으로 인해 비극이 발생하고 불행한 일을 겪을지라도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의 손을 내밀어주시고,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찾게 해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이 된 사람을 두고 예수님에게 “저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요 9:2)라고 질문했습니다. “조상이 신 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지금 내 이가 시리다”(겔 18:1)라는 당시의 격언처럼 한 인간의 불행 앞에서 인과율(因果律)을 해석의 잣대로 삼은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질병이나 불행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게 하시려는 것이다”(요 9:3)라고 말씀하시고 그 장님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이 사람이 장님이 된 것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시는 잔인한 분인가요.

분명한 것은 고난과 질병과 비극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만,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장님은 결과적으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게 하시려는 것이다”라는 원어의 뜻은 결과를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가 장님이 된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만, 그를 고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웨더헤드(Leslie D Weatherhead)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뜻’(The Will of God, Abingdon·1972)이란 책에서 하나님의 본래적인 뜻과 상황적인 뜻과 궁극적인 뜻을 구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래적인 뜻은 인간들에 의해서, 또는 악한 상황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무너질 수 있으나, 그 상황을 역이용하셔서 하나님은 자신의 궁극적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결정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