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곽경호] ‘철수 생각’과 ‘영희 생각’

입력 2012-08-20 18:49


철수에게는 영희가 있어야 된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만났던 철수와 영희가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철수의 생각보다는 영희의 생각이 더 궁금했다. 책에 담겨 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생각이 대권을 염두에 둔 ‘철수의 생각’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희의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까지 그 책을 읽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그 책의 내용을 이미 다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5만권의 장서가로도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는 한 번도 읽은 기억이 없는데 그 책을 완벽히 알고 있는 것 같은 경우가 세 가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자신의 지식이 점점 커지면서 책의 내용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 둘째는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읽다 보니 다 알게 되는 경우, 셋째는 다른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쓴 것을 읽고 나서 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경우라는 것이다.

책이 나오자마자 ‘하나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의 짜깁기’ ‘문제제기만 있을 뿐 구체적 대안이 없다’ ‘기성정당에서 나온 모범답안의 나열’이라며 여기저기서 내용을 자세히 소개해주고 있어 읽지 않고도 그 책을 다 읽은 것처럼 되어 버렸다.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가야 할 길이라면 총알 몇 방 맞더라도 가겠다며 국민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낸 책인데 정치권에서는 ‘사실상의 대권선언’으로 여기면서 날선 비수를 들이대고 있다.

정치는 누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더 잘할 수 있어서 나서야겠다는 의지인데, 안 원장에게는 의지가 없다며 그만두라고 하는가 하면 정치는 소명이라며 편을 들기도 한다. ‘안철수의 생각’(安心)을 알고 나니 안심(安心)이 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철수는 안 된다’(不安)며 불안(不安)해 하는 사람도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이스라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첫 대중교양서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간의 생각을 ‘빠른 직관’과 ‘느린 이성’으로 나눈다. 빠르게 생각하기는 ‘경험적 직관’이며 느리게 생각하기는 ‘합리적 판단’이라는 설명이다. 1973년 발표한 휴리스틱스 이론에 의하면 사람들이 ‘확률이나 이론 등 합리적 이성을 통한 판단’을 하기보다는 ‘경험이나 직관으로 어림짐작해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인간의 생각이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모범생이나 성공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안 원장 역시 합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깃발부터 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알아보고 꼬치꼬치 따져 본 뒤 자신의 선택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그를 두고 반칙이다, 부정출발이다, 말들이 많다. 지금까지 해온 일과 전혀 다른 일을 하기 위한 진중한 생각인지 국민의 기대를 한껏 키워 놓고 장외에서 저울질을 하는 고도의 정치행위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 생각이 맞느냐가 아니라 누구 말을 믿느냐이다.

마침내 기억 속의 철수로 돌아가서 우리들의 영원한 ‘철수와 영희’로 남든지 새로운 철수가 되겠다며 출사표를 던지든지…. 철수에게는 영희가 있어야 된다. 이제 모든 것은 영희의 생각에 달렸다. 우리들 모두가 바로 철수의 영원한 포르투나인 그 ‘영희’가 아닐까.

곽경호 방송작가·월간 SEE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