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다는 건 보이지 않는 힘에의 도전”… 아흔아홉, 도전은 계속된다
입력 2012-08-19 18:17
올해 백수(白壽·99세)를 맞은 한묵(본명 한백유) 화백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1세대 작가다. 서울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그는 광복 이후 북한에서 고교 교사로 재직하다 1951년 1·4후퇴 때 월남했다. 남한에서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활동한 그는 1961년 홍익대 교수직을 버리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창작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파리에서 예술적 자유를 누리면서도 당시 유럽을 강타한 미술운동인 ‘큐비즘(입체파)’에 관심을 가졌다.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큐비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보자기를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리듬과 생명력이 깃들었다는 평가를 얻었다. 캔버스에 역동적 우주 공간을 담은 작품은 그에게 ‘한국 기하추상의 대부’라는 별칭을 안겨주었다.
프랑스에서 활동한 지 51년째. 한국 미술사의 산증인인 그가 22일부터 9월 16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에서 전시를 연다. 10년 만의 대규모 개인전으로 1950년대 초기작부터 2000년대 작품까지 반세기 작품세계를 아우르는 40여점을 선보인다. 99세의 생존 작가가 전시를 여는 것은 드문 경우로, 지난달 숨진 윤중식 화백이 앞서 4월에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한 화백의 작품 경향은 1969년 인간의 달 착륙을 전후로 ‘평면 구성’과 ‘공간의 다이나미즘(역동성)’으로 구분된다. ‘전쟁의 단상’을 그린 50년대 작품은 폐허와 빈곤 속에서 고난을 헤쳐 나갈 상징으로 빛과 가족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이어 ‘조형요소 탐구’를 중시한 60년대 작품은 파리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색채와 형태, 마티에르에 대한 관심을 두면서 2차원적 평면 회화에 집중했다.
69년 인류의 달 착륙에 충격을 받은 그는 이후 평면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4차원적 작업을 시도했다. 다양한 기법을 이용해 우주의 공간감이 화면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80년대부터는 우주를 암시하는 단어들을 아예 작품 제목으로 삼았다. ‘상봉’(1991) ‘하늘의 정’(1992) ‘은색운의 원무’(1993) 등 작품들을 보면 광활한 우주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전시를 앞둔 작가는 소회를 묻는 질문에 “나는 죽음 가운데에 있고 그러면서 살고 있다. 죽음은 누구나 만나는 것이고 그냥 때가 오면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힘’에의 도전”이라고 답했다. 전시에 맞춰 일생 동안의 화업을 담은 생애 첫 화집(마로니에북스)이 출간됐다. 전시 도록에 서문을 쓴 파리 기메 아시아미술관의 피에르 캄봉 수석 큐레이터는 “그의 작품에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취향, 도약의 힘, 생명력, 완벽한 기하학에 대한 환희가 있다”고 평했다. 또 이번 전시를 주선한 대전 이응노미술관 이지호 관장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로서의 삶과 결과물이 일치하는 드문 작가”라고 말했다(02-519-080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