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3) 에크하르트 ③ 하나님 아들의 탄생
입력 2012-08-19 17:54
자기를 비우고 無가 될 때 영혼 안에 하나님 아들이 태어난다
자기를 비우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놓아버리는 삶이 궁극적으로 다다르려는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다. 에크하르트는 매일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왕국이나 심지어 온 세상을 놓아버렸다 해도 자기 자신을 붙잡고 있다면 그는 아무것도 놓아버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고 떠나는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
자기를 버리고 떠나는 삶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는 삶이란 모든 일이나 사물에서 자기를 무(無)로 만드는 것이며,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서 다시 태어난다. 에크하르트에게 자기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태어나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에크하르트는 세 가지 탄생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가 신성 안에서 태어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태어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세 가지 탄생이 있다. 삼위일체 내에서 성자 하나님의 탄생, 이 탄생은 초시간적이고 영원한 탄생이다. 성육신 사건으로서의 예수님의 탄생, 이 탄생은 유일회적 탄생이요 역사적 탄생이다. 그리고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아들의 탄생, 이 탄생은 성령 안에서 매일 일어나는 탄생이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나를 자기 아들로, 그것도 똑같은 아들로 낳으신다.”
에크하르트는 성육신으로서 예수님의 탄생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의 탄생이 나 자신의 탄생이 되지 않는 한 부족하다고 말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이다.”
에크하르트는 이를 위해 한 가지 예를 든다.
한 부부가 있었다. 아내가 불행을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부인, 왜 그렇게 슬퍼하오?”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다. “내가 슬퍼하는 것은 내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그 때문에 나를 덜 사랑할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얼마 후에 남편이 자기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아내에게 왔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눈 하나밖에 없소.”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다.
에크하르트는 계속해서 묻는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내 안에 똑같은 하나님이 태어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요 15:15)는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성부는 성자를 낳지 않을 수 없었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태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성자는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서 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
“성부 하나님은 영원히 그리고 끊임없이 신성의 깊이에서 성자 하나님을 낳고 성자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낳으신다.”
그래서 에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선언이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어머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독자는 없으리라고 본다. 하나님이 그 아들 안에서 역사에 태어난 것처럼 그의 아들도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는 이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창조의 본성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우리의 모든 욕망과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혼의 근저에 흐르는 생명의 샘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 본성의 씨앗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돌보시고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는 우리를 그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벧후 1:4).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신성에 참여케 하기 위해 하시는 일이 탈형(脫形)과 입형(入形)이다. 탈형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요, 입형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 속에 들어올 것이다. 그런데 탈형이든 입형이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
물론 영혼의 근저를 덮고 있는 잡다한 상들을 벗겨 내는 데에는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다.
돌파, 자기 깨뜨림
에크하르트는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독특한 단어를 사용한다. 바로 ‘돌파(durchbruch)’라는 단어이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자기 버림의 극치는 돌파이다. 돌파는 버림으로 시작된 자기포기를 극단으로 가져가는 지고의 신앙적 노력이며 결단이다. 버림(초탈)은 돌파를 낳고 돌파는 탄생을 낳는다.
비유한다면 이렇다. 버림이란 한 여자로서 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과 같다. 결혼하는 순간 그녀는 세상 모든 남자로부터 단절된다. 모든 남자와의 관계가 끊기고 한 남자에게 매인 것이 결혼이다. 결혼은 곧 출산으로 이어지고 출산은 반드시 산고의 고통을 동반한다. 누구나 결혼했다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처럼 자기를 버렸다고 그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꺼이 산고의 고통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산고가 산고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처럼 ‘돌파’도 ‘돌파’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돌파의 목적은 아기의 탄생이다. ‘돌파’는 요즘 용어로 ‘자기 깨뜨림’이다.
“조개의 안에 있는 속살이 밖으로 나오려면, 껍데기가 깨져야 할 것이다. 조개의 속살을 얻고자 한다면, 껍데기를 깨뜨려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태어나는 데 돌파가 먼저냐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냐고 묻지 말자. 왜냐하면 돌파는 처음부터 은총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고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기 때문이다. 은총은 인간적 노력 이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만,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을 끊는 단호한 인간적 결단도 필요하다. 그래도 굳이 어느 편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은총이든 자연이든 둘 다 하나님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이다.
마리아, 마르다 이야기
탄생을 중요시하는 그의 강조점은 마르다-마리아 두 자매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게 한다. 보통 마르다-마리아 사건의 핵심은 마리아는 관조적 삶을 대표하고, 마르다는 활동적 삶을 대표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우선적인 것은 마리아의 삶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반대로 해석했다. 동생 마리아는 영혼의 갈망이 있어 예수님 발 앞에 앉았지만 그 안에 있고, 언니 마르다는 관조적 삶에서 벗어나 남을 섬기고 돕는 삶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있는 삶이요, 마르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또한 세상 안에도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이렇게 영적 태중아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힘차게 세상 안에서 사는 삶이다.
그가 신비주의자였으나 하나님과 나, 그리고 수도원 안에 침잠하는 정적주의, 체험주의, 고행주의적 신비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수도원에서 빠져나와 종교개혁을 실천한 루터의 삶과 행동에 어떤 원형을 제공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 가깝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세상 안에서 힘차게 살라고 소리친 에크하르트의 음성이 오늘날과 같은 탈종교 시대에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는가?
이윤재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