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비아대학원 석사과정을 1년 안에 마친다고요? 안 될 텐데, 다른 곳을 지원해 보시죠.”
2009년 1월 미국 뉴욕,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김해영(47·여) 국제사회복지사는 주변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대학 장학금을 지원해주며 격려했던 이들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대부분 돈과 실력, 체력이 부족한 그가 현실적으로 명문 대학원에 입학하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을 내놨다.
하지만 그의 사전에 ‘포기’란 단어는 없었다. 134㎝의 작은 키, 척추장애, 초등학교 졸업 이후 일하며 고학으로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 기계편물 금메달리스트, 보츠와나 직업학교 교장…. 고난의 시간을 견뎌온 그에게 불가능은 또 하나의 의견일 뿐이었다. 2010년 5월, 그는 1년 만에 컬럼비아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월급 3만원 식모에서 꿈을 키워온 그가 세계의 약자를 돕는 국제사회복지사가 된 ‘인생역전’의 순간이었다.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
“얘야, 여기서 10년 일하면 100만원쯤 벌 수 있단다. 네 전에 있던 언니도 그렇게 했지.”
1979년, 주인 할머니는 갓 입주한 14세 식모 김해영에게 10년 뒤 이야기를 들려줬다. 술 취한 아버지의 학대와 자살,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온 그이지만 식모생활이 장밋빛 미래가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는 1년 만에 식모를 그만두고 한남직업전문학교에 입학해 기계편물 3급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졸업 이후엔 전문기술자가 되기 위해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편물기술을 익혔다.
하루 12∼14시간의 중노동에도 그는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공부할 때만큼은 암담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행복의 대가는 혹독했다. 매일 척추장애로 인한 극심한 허리통증이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육체적 고통으로 힘들 때마다 ‘내가 지금 살아있다’란 생각으로 견뎠어요. ‘나보다 어려운 사람도 많은데 이만하면 다행이지’라고 생각하면서요. 힘든 상황이라도 살아 있는 게 중요하지 어려운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러한 삶의 태도로 그는 82년부터 4년 동안 7번의 기능대회에 출전해 3개의 금메달을 땄고 정부로부터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검정고시 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중·고등학교 과정도 마쳤다. 일본유학의 길도 열렸다. 6개월 동안 고급 편물기술을 배운 뒤 강사증을 받았고 기술을 살려 취업도 했다. 기술을 연마하면서 그의 사회적 위상 역시 점차 높아졌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그의 나이 24, 모든 일이 안정적으로 잘되고 있었다. 가족과의 관계도 회복됐고 6년간 만나던 남자친구와는 결혼을 약속했다. 대학 입학에 한 번 떨어졌지만 다시 공부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 그가 아프리카 행을 택한 건 한 기독교 잡지에서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 10계명 기사를 보고 나서부터다.
“‘금메달도 따고 일본 유학도 다녀오다니, 이건 내 능력만으로 된 건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장에서 일할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당시 저는 예수님이 과분한 은혜를 주신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고 봤어요. 그러던 차에 이 기사를 봤고, 받은 은혜를 갚자는 마음으로 나를 원하는 곳이 어디든 가기로 결심한 거죠.”
그리고 나서 그는 대입 시험 전 봤던 그루터기 선교회의 광고쪽지를 다시 찾았다. 보츠와나 직업학교에서 편물교사를 할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10여년간 편물기술을 갈고닦은 그에게 선교회는 ‘준비된 인재’라며 개학식에 맞춰 한 달 뒤 출국할 것을 권했다.
사막에서 얻은 선물
1990년부터 2003년까지 그가 14년간 봉사한 보츠와나 굿호프 직업학교는 칼라하리 사막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편물교사로 시작해 폐교 위기에 몰린 학교를 살리고 교장으로 취임 뒤 450명의 제자를 키우는 등 보람도 있었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우선 보츠와나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가 힘들었다. 전문 기술자의 삶을 버리고 오지인 이곳에 왔지만 이를 알아주는 현지인은 없었다. 말라리아로 올케와 조카를 잃는 희생이 있었고 강도를 만나기도 했다. 출근 전 매일 방을 청소하는 게 습관이 됐다.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신변정리를 해두자는 심산에서다. 사막의 삶은 이만큼 거칠었다.
하지만 그는 광막한 사막에서 중요한 것들을 배웠다. 교육사업을 하며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을 배웠고 보츠와나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됐다.
“장애와 배우지 못한 설움 등 내 상처를 말할 때 흑인 여성과 장애인들이 마음을 열고 용기를 얻더라고요. 제 아픔에 동질감을 가진 그들은 절 친구로 믿고 사랑해줬습니다. 한국에선 뭘 해도 그저 ‘장애인’으로 보겠지만 그들은 저를 ‘멋지고 아름다운 김해영’으로 대했습니다. 그때 알았죠. ‘아, 나도 한 여성이자 사람이구나!’”
또 그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다. 14년 동안 보츠와나 현지인처럼 지내며 특권을 내려놓고 살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됐다. 이 곳에 오기 전 재미없게만 느껴지던 성경도 10번 이상 통독했다.
“기독교의 핵심은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고 이를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로 찾아가 그들과 같이 되는 것임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종교인 김해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바뀐 중요한 증거는 제 특권인 의사결정권을 스스로 내려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된 삶 아니겠어요?”
보츠와나 상공부의 지원으로 기술학교가 어느 정도 안착이 되자 그는 더 큰 꿈을 품었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에서 사회적 약자를 돕는 국제사회복지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공부는 2004년 미국 뉴욕 나약대를 거쳐 2010년 컬럼비아대학원까지 이어졌다.
“미국으로 유학 와 석사까지 마친 것은 분명 제게 기적이었습니다. 내게 왜 이런 기회가 왔을까 고민했는데, 결국은 ‘하나님께서 나를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에게 보내기 위함’이라고 결론을 내렸죠. 졸업 후 오바마 행정부에 지원할 자격도 있었고, 미국에 남을 기회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삶으로 보이는 것
선교사였던 그이지만 저서나 인터뷰, 강연에서 종교적 용어를 최대한 자제한다. 청중을 고려한 탓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로 하나님을 느끼게 해야 된다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컬럼비아에서 수학하면서 제가 살아온 인생이 믿지 않는 사람을 공감케 하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끼리만 이해하는 용어를 쓰기보단 그들이 이해하는 보편적 방식이 뭔지를 이해하고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도요.”
그가 말하는 보편적 방식이란 ‘삶으로 복음 전하기’를 말한다. 신앙과 삶의 방식이 일치하는 삶을 살면 가르치지 않고도 복음의 핵심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학 중 교회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친구를 사귀었는데 4년 뒤엔 그 친구가 제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슬쩍 얘기해요. 친구에게 ‘기독교’ ‘교회’ 같은 용어를 써 말한 적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내 이야기와 삶 속에는 다 기독교적 가치가 배어있죠.”
일반 대중 강연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공공기관, 대학교 등 다양한 청중에게 그는 보편적이고 절제된 표현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청중은 그의 삶에서 초월자의 존재를 느낀다. 장애로 인한 작은 키가 자신을 만들고, 원치 않는 상황에 감사하며 홀대하는 이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그의 논리 기반엔 신앙인의 자세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제가 10대부터 스스로 약속한 것이 ‘마음 아픈 일을 하지 않기’예요. 몸이 평생 아플 텐데 마음까지 아프게 하면 2중으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 시기와 같은 나쁜 마음을 갖지 않기로 했어요. 하나님이 용서한 나를 내가 용서 못하고, 용서 받은 내가 이웃을 용서할 수 없다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니까요.”
대신 그는 고난을 해석하라고 조언한다. 사고, 실직, 재난 등 인생의 모든 어려움은 원치 않아도 찾아온다. 불평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를 따져보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다.
“‘빙점’의 미우라 아야코 여사가 제 롤모델이에요. 이분에게서 삶의 고난을 해석하는 방법과 종교적 용어를 쓰지 않고도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힘은 고난에서 온다는 사실도요. 그만큼 치열한 고통과 고독이 있었다는 거죠. 이에 동의해요. 저 역시 고통과 고독이 많을수록 더 괜찮은 사람이 됐거든요.”
대한민국에서 온 희망의 전설
최근 그는 졸업 후 맡게 된 부탄 지역사회 개발 프로젝트 팀장에 이어 또 하나의 직함을 경력에 추가했다. 올해 6월부터 밀알사회복지재단의 희망사업본부장으로 취임했기 때문이다. 그의 행보를 눈여겨보던 재단 상임위원장이 그의 책 출판기념회에 와 제의한 게 계기가 됐다. 2년간의 임기동안 그는 6개 NGO와 캠페인 주관 방송사와 함께 에티오피아, 시에라리온, 우간다 등 아프리카 대륙에 학교를 세우고 협력단체를 발굴해 지원할 계획이다.
임기를 마친 뒤엔 못 다한 공부도 다시 한다. 사회복지학 박사학위에 도전한다는 그는 컬럼비아를 비롯해 여타 미국 대학원에 지원할 예정이다.
결혼을 한다면 보츠와나에 가서 살 것이라는 그는 은퇴 후의 삶뿐 아니라 장례까지도 그곳에 계획해 놨다. 14년간 헌신했으면 다른 곳에 가서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희생’ ‘헌신’이란 표현을 경계했다.
“보츠와나에 묻혀 후세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대한민국에서 온 이 조그만 사람은 왜 자기가 누릴 특권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사막에서 죽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희생이 아닌 좋아서 아프리카를 섬긴 사람’이었으면 좋겠고요. 그래서 2세대가 기억하는 인물로 남고 싶어요. 이 정도면 대단한 명예 아닌가요?”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이 땅의 희망지기-김해영] 금메달·유학·교장… 넘치는 은혜, 하나님이 왜 주셨을까요
입력 2012-08-17 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