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댁 로살리 ´거제도 정착기´] “빨간 대야·빈 콜라병, 바라보면 웃다가 눈물이…”
입력 2012-08-17 18:30
살림살이에 깃든 사연
플라스틱 대야, 반쯤 쓴 약병, 앨범 속 사진, 크리스마스 트리, 못에 걸린 옷가지, 갓 딴 운전면허증….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일상의 물건들, 그것들이 이야기를 한다. 손때 묻은 집안 물건에는 개인사, 가족사, 나아가 지역사가 응축돼 있다. 여기, 경남 거제에 사는 다문화가정의 26평 아파트 살림살이를 쏟아놓았다.
살림살이로 문화를 들여다본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이 민속의 개념을 ‘지금, 여기’까지로 확장하고 한국의 다문화사회에 대한 조사 작업을 벌이고 있다. 연구방법의 하나가 살림살이를 통한 특정 지역 문화 들여다보기다. 조선업종 경기를 타고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여성이 늘고 있는 거제시도 연구 대상이다. ‘거제 도시민속조사팀’(팀장 강경표 학예연구사)이 지난 1월부터 조사를 벌여왔다.
살림살이는 삶의 모든 부분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다문화가정 26평 아파트의 살림살이가 들려줄 얘기가 궁금하지 않은가. 바로 이 집 안주인 얘기다. 그녀 이름은 날도자 로살리(35). 삼성중공업 용접공 이수범(46)씨에게 시집 와 ‘필리핀 댁’으로 살아왔다. “제가 로살리인데예.” 인터뷰를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선 너머 그녀의 억양엔 경상도 사투리가 진했다. ‘어, 필리핀 댁 맞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과 이주
①합동결혼식 사진=운명이었다. 2002년 8월, 이수범씨는 국제결혼을 위해 선을 보러 필리핀에 갔다. 이씨는 맞선상대였던 친구를 동행한 로살리씨를 맘에 들어 했다. 그녀도 말쑥한 차림의 이 ‘코리안 가이’가 좋았다. 한 달 뒤, 거제로 시집 와서 살아온 지 어느새 10년이다. 뒤늦게 2009년 12월 경남도 주선으로 마산MBC홀에서 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을 치렀다.
②필리핀 결혼식 사진=혼인 후 결혼식이 없어 서운했던 그녀는 2004년 필리핀 만달루용으로 친정나들이를 갈 때 그곳 시청에서 약식 결혼식을 올렸다. 만달루용 시장이 참석했다.
③친정어머니가 주신 목걸이=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간 오빠가 어머니에게 선물로 준 금목걸이. 아끼던 이걸 어머니는 한국으로 시집가는 딸 로살리에게 줬다. 목걸이를 볼 때마다 부모님과 3남6녀 형제들이 생각난다.
④고향 친구 연락처 수첩=친구들 연락처가 빼곡히 적힌 이 수첩을 볼 때면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가난했던 그녀는 대학 다닐 때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등록금을 댔다.
⑤크리스마스 트리=필리핀에서 가져왔다. 필리핀은 9∼12월 내내 크리스마스 무드에 빠진다. 제일 잘 보이는 거실 에어컨 위에 두었다.
#갈등과 화해
①플라스틱 대야=고향에선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아침마다 대야와 바가지를 이용해 샤워를 했다. 신혼 초, 필리핀 습관대로 새벽에 샤워를 하다 “남편 출근도 안 시키고 씻기부터 한다”고 한집에 사는 시어머니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다용도실에 세워둔 대야를 보면 그때 기억에 피식 웃다가도 저도 모르게 눈가에 물기가 맺힐 때가 있다.
②콜라병=“필리핀 사람 피에는 콜라가 흘러 다닌다”고 할 정도로 고향에선 식사 때마다 콜라를 즐겼다. 무더운데다 음식이 기름진 탓이다. 시어머니는 “이빨 썩는데, 와 자꾸 묵노?”라며 싫어하셨다. 목소리가 크신 경상도 시어머니는 항상 화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해는 고부 갈등을 키웠다.
③콩나물국=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먹지만 시어머니가 처음 해주신 콩나물국을 입에 댔을 때의 ‘지독했던 비린내’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매운 걸 못 먹어 매끼 상에 오르는 김치도 고역이었다.
④결혼반지=고부 갈등 끝에 7개월 만에 이혼했다. 뱃속에는 생명이 자라고 있는데…. 필리핀으로 가는 대신, 경기도 부천의 베개 공장에서 일했다. 헤어졌지만 결혼반지만은 손가락에서 빼지 않았다. “다시 합치자.” 어느 날, 부천으로 올라온 남편이 말했다.
⑤기도책과 갓 태어난 상진이 사진=필리핀에서 가져온 낡은 기도책을 부여잡고 기도하면 모든 게 이뤄졌다. 남편과의 재결합 소원도, 아이들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도. 첫 손주 상진이는 시어머니 마음을 돌리게 한 갈등 해소의 촉매였다.
#적응과 정착
①만사닐라오일과 에피카센오일=필리핀에서 머리 아프거나 배 아플 때 각각 그 부위에 바르는 전통 약이 만사닐라오일과 에피카센오일이다. 거제 집에서도 상처 나면 바르는 ‘빨간약’처럼 애용하는 상비약이다.
②요리책=필리핀 음식을 입에도 못 대는 남편 때문에 요리책을 보며 한국 음식을 만드는 법을 익혔다. 남편은 된장찌개, 상진(10)이는 김치볶음밥, 둘째 수진(6)이는 새우볶음밥을 제일 좋아한다.
③필리핀제 수세미=빨래할 때는 부드러운 필리핀제 수세미를 쓴다. 한국 것은 거칠어서 옷감이 상하기 때문이다.
④영어교육 도구=지난해 봄부터 초등학교 영어 보조교사로 일한다. 그녀를 위해 영어강사인 필리핀인 친구들이 선물로 줬다. 이 일을 하는 건 상진이가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상진이는 학교 친구들이 ‘필리핀, 필리핀!’이라고 놀려 기가 죽어 있다.
⑤필리핀 전통 의상 바롯사야=다문화 행사 때 입으려고 가져왔다. 이런 모임엔 남편도 적극적이다. 신혼 초, 남편은 남의 시선을 의식해 저만치 떨어져 걸었다. 지금은 보란 듯이 손잡고 걷는다. “상진이에게 엄마를 당당히 여기는 아빠를 보여주고 싶다.” ‘다문화 전도사’가 된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