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임기 내 완공의 함정

입력 2012-08-17 18:10


2009년 1월 15일로 거슬러 올라 가보자.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소격동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부지 강당에서 문화예술인들과 신년 인사회를 가졌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기무사 부지를 미술계의 오랜 숙원인 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서울 도심에 국립미술관이 들어서기를 학수고대한 미술인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미술계는 1996년부터 기무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미술관을 짓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기무사 이전이 확정된 후 이 터의 활용방안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2008년 청와대는 복합문화관광시설을, 문화체육관광부는 현대사박물관을 짓는다고 각각 발표하는 등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미술계는 반발했고, 결국 미술관 건립으로 낙착됐다.

이 대통령의 발언 후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 부지에 있는 10개 건물을 헐지 않고 리모델링해 서울관을 2012년쯤 완공하겠다”고 밝혔다.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외진 곳에 있는 탓에 관람객들로부터 외면 받아온 실정이어서 서울관 건립이 시급하기는 했다. 그러나 3년 만에 미술관을 짓겠다는 발상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문화재 발굴 조사와 건축 설계안 공모 등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 “서울관 조성은 참여정부 때부터 나온 얘기인데 대통령이 선심 쓰듯 발표하고, 장관이 대통령 임기 중에 완공하겠다고 거드는 모습이 좀 그렇다.” 이런저런 의견이 제기됐지만 미술관 건립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10년 8월 6일 서울관 설계 당선작이 발표됐다. 당시 미술관 측은 “8개월의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거쳐 시공 20개월 일정으로 공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술관 부지에 대한 문화재 발굴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설계의 공모·선정 절차를 미리 진행한 것은 ‘임기 내 완공’에 발목 잡혔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해외 선진국의 사례를 보자.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는 6년, 영국 런던의 테이터 모던은 8년의 건축기간이 소요됐다. 무슨 가게나 상점도 아니고 명색이 국립미술관을 짓는 일인데 20개월 만에, 순수 건축공사기간은 불과 13.5개월 만에 끝내겠다니 부실시공이나 각종 사고는 예고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무사 터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으로 지어진 이곳은 근대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8년 등록문화재(375호)로 지정됐다. 1979년 10·26 사태 때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이 이곳에 있던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처음 안치되고, 10·26 사태 이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2·12 쿠데타를 모의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왕의 어진을 보관하고 왕실 친척들의 사무를 총괄하는 관청인 ‘종친부’가 있었다. 1981년 이 자리에 테니스장을 지으면서 종친부 일부인 경근당과 옥첩당(서울시유형문화재 9호)을 지금의 정독도서관으로 이전했다. 종친부 건물을 제자리로 옮기는 복원공사를 진행 중인 문화재청은 12월까지 이전을 완료할 계획이다.

유서 깊은 이곳에 들어설 미술관은 현재 공정률 48.2%로 내년 2월 5일 준공 예정이다. 미술관 측은 “사고 수습이 끝난 후 정밀 안전진단을 통해 공사 연기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화재 원인과 책임 문제는 경찰 조사 결과 밝혀지겠지만 ‘임기 내 완공’의 함정에 빠져 무리하게 서두른다면 또 다른 사고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