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민태원] 박원순식 ‘소통·협치’ 실험 열 달

입력 2012-08-16 18:45


서울시가 언론사 대상으로 매일 내놓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동정 보도자료에는 ‘청책(聽策)’이니 ‘숙의(熟議)’ 같은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굳이 말하자면 청책은 ‘정책 입안에 필요한 다양한 의견을 듣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복지·일자리·도시계획 등 핵심 시정(市政)에 대해 시민들의 여러 제안을 받아 정책에 적극 반영하겠다는 박 시장의 의지가 담겨 있다.

숙의는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한다’는 뜻이다. 박 시장은 매주 금요일을 특별히 ‘숙의의 날’로 정해 담당공무원·전문가·시민들과 특정 정책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청책과 숙의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책 수립 과정은 시민이 정책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참여하는 ‘민·관 협치(協治)’를 실현코자 함으로 해석된다. 이를 통해 정책에 따른 갈등과 시행착오를 예방하고 사회·경제적 비용도 줄일 수 있다는 게 박 시장의 소신이다.

주민참여예산제, 1000인의 원탁회의, 명예부시장제 등이 협치 실현의 의지가 실린 대표적인 제도들이다.

박 시장은 지난해 10월 취임 직후부터 ‘소통과 협치’ 행정을 본격화했다. 그러면서 직접 현장으로 뛰었다. ‘상명하복’식 탁상행정에 길들여져 있던 공무원 조직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것도 사실이다. 이명박, 오세훈 등 전임 시장 때도 시민과 스킨십을 늘리려는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시정 전반에 ‘아래로부터의 행정’을 시스템화하려는 것은 박 시장이 처음이란 게 서울시 공무원들의 얘기다.

‘박원순식 행정 실험’ 10개월이 다 돼 가는 현재, 겉으로 드러난 성과는 그럴듯해 보인다. 박 시장 취임 이후 올해 7월 말까지 이뤄진 ‘청책 워크숍’은 34회(월 3회 개최)나 되며 참여한 시민은 4490여명이다. 주제는 청년 일자리, 사회적 기업, 전통시장, 도시농업, 책 읽는 도시, 공공의료 시스템, 제2인생 설계 등 다양하다. 청책을 통해 만들어진 정책 초안에 대한 숙의도 35차례나 진행됐다.

서울시가 지난해 11월 26일∼올해 5월 말 진행된 청책 워크숍에서 제기된 총 339건의 시민 의견 중 208건(전체의 61.4%)은 실제 정책에 반영됐다고 한다. 최근 발표된 ‘책 읽는 도시, 서울 만들기’ ‘공공의료 마스터플랜’ 등은 청책을 통한 정책 수립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과 협치’가 구현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박 시장이 최근 규제를 강화하거나 재검토하면서 논란이 커진 강남 재건축, 도심 뉴타운, 강남순환고속도로 건설사업 등에 대해 시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전임 시장들의 개발 정책을 무조건 전시행정으로 폄하하고 반대하는 박 시장의 ‘감정 행정’이 오히려 ‘불통과 불협치’를 낳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따라서 이 시점에 시민 소통에 문제는 없는지, 피드백(feed back) 시스템은 잘 돌아가는지, 관심사가 편협하거나 감정에 치우치지는 않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서울시민 495명을 조사한 결과 61.8%가 청책 제도에 대해 모른다고 답한 것은 소통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조직 내부의 불만도 없지 않다. 수차례 청책과 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책 수립과 집행이 늦어지고 일거리가 많아진 게 사실이다. 공무원들의 “힘들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터져 나오고 있다. 박 시장의 행정 실험이 성공을 거두려면 지금쯤 안팎의 이런 지적들에 귀 기울이고 점검해 봐야 한다.

민태원 사회 2부 차장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