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의 풍경] 오장환과 남만서점
입력 2012-08-16 18:37
‘北 이용악-南 오장환’ 문학적 영토 분할의식의 귀결
시인 오장환(1918∼1951)은 스무 살 때인 1938년 서울 관훈동에 고서점을 열었다. 이름이 남만서점(南蠻書店)이다. 당시 고서점 이름으로 유행하던 ○○당(堂)도 아니고, 서점 이름에 많이 들어가던 ‘문(文’)이란 글자도 없이 문자 그대로 ‘남쪽 오랑캐 서점’이다. 이름이 이상했던지 문우 이봉구(1916∼1983)는 이런 글을 남겼다.
“(오)장환이 경영하고 있는 책점은 남만서점이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서점 진열장에 놓인 흰 토끼털 위엔 보들레르의 시집 원서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울긋불긋한 무당의 큰 부채가 놓여 있고 정면 벽에는 포오의 사진과 연필로 그린 이상(李箱)의 자화상이 걸려 있어 이채를 띄었다.”(이봉구 ‘도정(道程)’에서)
오장환은 왜 서점 이름을 남만서점으로 지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오장환이 1936년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도쿄에 ‘남만서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서점은 ‘러시아 대혁명사’ ‘코민테른의 성립과 발전’ 등 좌익서적을 펴내 발매금지를 당한 적이 있었던 만큼 귀국 후 서점을 열면서 의식적으로 그런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혹여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로 시작되는 이용악(1914∼1971)의 유명한 시 ‘북쪽’을 염두에 두고 이용악의 북방지향과 대비되는 상징으로 ‘남만’이란 이름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용악이 북쪽이라면, 오장환은 남쪽을 관장하겠다는 문학적 영토의 분할의식에서 ‘남만서점’이란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오장환과 이용악의 문학적 길항관계는 첫 시집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1937년 5월 도쿄의 삼문사(三文社)에서 출간된 용악의 첫 시집 ‘분수령(分水嶺)’과 역시 1937년 7월 도쿄의 풍림사(風林社)에서 출간된 장환의 첫 시집 ‘성벽(城壁)’은 각각 고개(嶺)와 벽(壁)을 표제로 삼고 있다. ‘분수령’이란 고개에서 물길이 갈라지는 산마루를 가리키는 말이거니와 어떤 사태가 발전·전환하는 지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벽’ 역시 안과 밖 혹은 어떤 지역이나 여느 세상과 구분 짓는 장치를 가리킨다.
두 사람은 모두 전통문화와 서구 근대문명이 뒤섞이는 시대적 조류를 배경삼아 ‘분수령’과 ‘성벽’이라는 장소적 거점을 바탕으로 문학적 출발을 천명했던 것이다. 이런 장소적 거점 의식이 ‘북에 이용악, 남에 오장환’이라는 분할 의식으로 전환돼 ‘남만서점’으로 귀착됐을 공산이 높다.
오장환은 학업을 중단하고 1937년 가을 귀국한다. 바로 그해 아버지 오학근이 사망하고 물려받은 유산으로 남만서점을 열었던 것이다. 남만서점은 문학전문서점이었다. 보들레르 시집 원서는 물론 절판·한정판·호화판·진귀본이 꽉 들어차 있었다. 게다가 선배 시인 이상(1910∼1937)이 1936년 말, 일본으로 가면서 오장환에게 건넨 연필로 그린 자화상까지 걸어놓고 문학전문서점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휘문고 재학 중 스승인 정지용에게 사사하며 교지에 시를 발표한 오장환은 1933년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으로 등단했고, 바로 그해 이상이 종로통에 문을 연 다방 ‘제비’에 드나들면서 이상과 친교한다. 만 15세의 오장환은 너무 성숙했다. 딴은 이상이 1937년 도쿄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오장환이 이상의 초상화를 서점에 걸었던 것은 그를 추모하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남만서점을 가득 채운 책들은 당시 경성제대교수 미야케(三宅)의 부인이 하던 고서점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미야케가 사상문제로 투옥됐을 때 부인은 남편의 개인 장서를 가지고 서점을 열었는데 미야케 부인과 알고 지내던 이봉구를 따라 오장환 역시 그 서점에 자주 출입을 했다. 남만서점 경영엔 미야케 부인의 자문도 한몫했을 수 있다. 남만서점은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고객은 줄을 이었다. 수입도 많아서 오장환은 멋진 양복과 넥타이를 사흘 건너 바꿀 정도였다.
이봉구는 이렇게 회고했다. “학교고 무엇이고 문학으로 인하여 모두 팽개치고 동경으로 드나들며 색깔 진 양복과 넥타이에 그 좋아하는 시집 중에 진본, 호화판, 초판 등을 사들이었고 운니동 집에서 눈만 뜨면 아침밥을 먹기가 무섭게 우리들이 모이는 ‘미모사’ ‘낙랑’ ‘에리사’로 뛰어나왔고 이곳에서 해가 저물어 거리에 밤이 오면 제가끔 주머니에서 돈을 털어 모아 춘발원 배갈집으로 향하여 밤 이슥해서 집으로 찾아들어 아무 방이고 닥치는 대로 들어가 코를 골았다. 문학을 위하여 사는 보람에서 도취되어 장환은 살아 나왔다.”
서점의 호황은 출판으로 연결됐다. 당시엔 서점이 출판을 겸업하는 예가 많았다. 오장환은 ‘남만서방(南蠻書房)’이란 출판사를 등록한 뒤 자신의 두 번째 시집 ‘헌사’와 김광균(1914∼1993)의 첫 시집 ‘와사등’을 1939년 차례로 출간한다. 그러나 갓 스물을 넘긴 청년 오장환은 생애 첫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걸 천직으로 삼기엔 너무 젊었다. 결국 남만서점은 1940년 문을 닫고 만다. 이봉구는 “일년도 못 가 ‘남만서방’은 들판에 나고 오장환은 도쿄로 떠나버렸다”고 회고했다.
오장환이 1940년 7월에 쓴 산문 ‘팔등잡문’에 “오늘도 명치정엘 나와 당구를 하며 콩가루 섞인 커피를 마시며 어떠면 지방 문청(文靑)이나 올라와서 어떻게 인사할 기회를 얻어 가지고 맥주나 마실까 맥주나 마실까…”라고 한 것을 보면, 서점 경영은 겨우 2년 남짓으로 끝내고 이내 전형적인 식민지의 룸펜으로 휘청거리는 한때를 보냈던 것이다. 그는 술이나 밥이 나올 데를 찾는 데 선수였다.
미당 서정주와 이봉구 등 신진문인들을 이끌고 문학청년을 외아들로 둔 토건업자를 찾아가는가 하면, 사설병원의 약장을 열어 알코올에 물을 타 술 대용으로 마시기도 했다. 그뿐 아니었다. 종로나 본전통 맥주집 주인들과도 교분이 두터움은 물론 그곳의 웨이터들, 남자 접대부인 ‘오동갈보’들과도 형님 동생하고 지내는 사이여서 맥주 한 병 값을 주고도 두세 병을 주인 몰래 마실 수 있었다. 오장환은 하는 일도 스마트해서 서정주 이용악 이봉구와 바에라도 들어설 양이면 여급들이 떼거리로 달려와 팔과 가슴에 매달렸다고 한다.
술집 주인들도 그를 좋아해서 외상술을 즐겁게 내었다. 자연스럽게 오장환 패거리로 불릴 만큼 한 무리 가난한 시인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오장환은 대장 노릇을 했다. 오장환은 당시 ‘시인부락’ 동인이기도 한 서정주의 시에 홀딱 반해 갓 신인인 데다 시가 몇 편 되지 않는데도 미당의 첫 시집을 ‘남만서방’에서 내자고 제안했다. 시 원고가 1938년에 건네졌지만 이후 1940년 미당이 만주로 떠나고 남만서점도 문을 닫는 등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시집 출간은 미뤄졌다. 그러던 차에 ‘시인부락’ 동인이기도 한 남대문약국 주인 김상원이 500원을 내놓아 1941년 2월 10일 100부 한정판으로 미당의 첫 시집 ‘화사집’이 출간됐던 것이다.
제1번에서 15번까지는 저자 기증본, 16번에서 50번까지는 특제본, 51번에서 90번까지는 병(竝)제본, 91번에서 100번까지는 발행인 기증본이었다. 특제본 35권의 표지는 유화용 캔버스로, 등때기는 비단에 ‘花蛇集(화사집)’ 세 글자만 붉은 실로 수를 놓고, 본문은 전주 태지(笞紙)를 여러 겹 붙여 다듬이질 했으니 책의 호사를 있는 대로 부렸다. 특제본은 5원, 병제본은 3원이었다. 탁주 한 사발에 안주 하나 곁들여 5전이었다니 특제본 한 권 팔아 선술집 돌아다니며 100잔의 술을 마셨다고 한다.
서문이나 저자의 후기도 없었다. 발행인 오장환은 “그여코 내 손으로 화사집(花蛇集)을 내게 되었다. 내가 붓을 든 이후로 지금에 이르도록 가장 두려워하고 끄―리든, 이 시편을 다시 내 손으로 모아 한 권 시집으로 세상에 전하려 한다. 아―사랑하는 사람의 재앙 됨이여!”라고 쓴 뒤 붓을 놓고 말았다. 다만 제작비를 댄 김상원이 받아서 “정주가 ‘시인부락’을 통하야 세상에 그 찬란한 비늘을 번득인지 어느 듯 5∼6년, 어찌 생각하면 이 책을 묶음이 늦은 것도 같으나 역(亦), 끝없이 아름다운 그의 시를 위하야는 그대로 그 진한 풀밭에 그윽한 향취와 맑은 이슬과 함께 스러지게 하는 것이 오히려 고결하였을는지 모른다”고 발문을 썼다. ‘화사집’ 출간을 끝으로 오장환은 다시 현해탄을 건너갔던 것이다.
오장환은 누구
1918년 충북 보은 출생. 휘문고에서 시인 정지용에게 사사. 1933년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을 발표하고 데뷔.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삼재(三才)로 불림.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 광복 후 월북해 1951년 사망. 시집으로 ‘성벽’(1937), ‘헌사’(1939),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 등이 있음.
◇자문교수(가나다순)=유성호(한양대) 이상숙(가천대) 최동호(고려대·한국비평문학회장)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