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으면 시인이 아니다”… 민용태 시인 에세이집 ‘시에서 연애를 꺼내다’

입력 2012-08-16 18:23


민용태(69) 시인의 에세이집 ‘시에서 연애를 꺼내다’(고즈윈)는 부제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시’가 암시하듯 사랑 시에 관한 해설집이다.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칠레의 네루다에서부터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와 서정주, 그리고 민용태 자신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시인 12명의 작품 세계를 특유의 열정적인 해설로 풀어낸 그는 “시인은 사랑하지 않고는 시를 쓸 수 없는 존재”라며 “때문에 사랑 시를 썼던 시인들은 모두 사랑 지상주의이며 사랑하지 않으면 시인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 늘 체념으로 얼룩진/ 시 쓰기 연습이 너를 구원하지 못한다./ 꿈의 물살도 별도 너를 구원하지 못한다./ 여명은 모두 다 쓸려간 밤에 모든 것을 잊는다./ 오직 한 여인이 너의 마음을 끈다./ 다른 여인과 똑같은 여인이면서 오직 하나인 그녀.”

보르헤스(1899∼1986)가 73세 때 낸 마지막 시집 ‘호랑이의 황금’의 표제 시이기도 한 이 작품은 그가 죽기 3개월 전에 결혼한 일본계 여인 고타마에게 바치는 시로 유명하다. 민 시인은 ‘다른 여인과 똑같은 여인이면서 오직 하나인 그녀’라는 구절에 방점을 찍으면서 말한다. “여기 내 곁에 있는,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꿈이 있다. 바로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여인이다. 모든 책 속의 여인, 모든 길가의 여인, 그가 사귀었던 그 모든 여인들과 하나 다를 바 없는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 같으면서 다르다. 내 눈에 나의 느낌에 그녀는 다르다.”(26쪽)

마치 날마다 맞이하는 아침이면서도, 오늘 아침이 다르게 느껴지듯, 수많은 나날 가운데 유일한 아침에 그녀가 있는 것이다. 말년에 시력을 잃었던 보르헤스를 대신해 글을 받아 적었던 비서 출신의 고타마. 보르헤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던 서사시의 영웅은 모두 죽었다. 그들은 문학이 기억하는 허수아비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지금 살아서, 내 손길에 와 닿는 여인이야말로 황금의 존재가 아니겠는가.

“짐승스런 웃음은 달더라 달더라/ 울음같이 달더라”(‘입맞춤’)라는 구절을 통해 미당 서정주의 에로스적 탐미주의를 풀어낸 대목도 흥미롭지만 에세이집의 압권은 ‘민용태가 쓴 민용태론’이라 할 3부 ‘사랑, 끝없는 허기의 지평선’이다. “내가 스페인에서 깊은 사랑에 빠진 것은 사실 스페인에서 산 지 5년쯤 지나서였다. 사드는 ‘금지된 쾌락이 최상의 쾌락’이라고 했던가. 이미 유부남인 나의 사랑은 모두 부적절한 관계였다. 그러나 사랑과 감정에 윤리나 지도가 있을 리 없다.”(209쪽)

결혼 후 혼자 떠난 스페인 유학 시절의 사랑 이야기를 낱낱이 고백해놓은 민 시인은 16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 아내(64)도 알고 있는 얘기지요. 허허실실 이런 얘기를 끄집어낸 이유는 사랑 시의 본질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죠. 시는 삶과의 직접적인 밀착인 셈인데, 그것은 예술의 위선성과 맞물리게 돼 있어요. 누군가를 사랑해야 시를 쓸 수 있으므로, 여기서 위선성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흔히 ‘언행일치’라고 말하지만 예술은 애초부터 언(시)과 행(삶)이 일치되지 않지요. 그 일치되지 않는 위선성을 극복하는 것이 예술이겠지요. 혹자는 ‘무서우리만큼 고백적이라서 민용택이 부인에게 살아남을지 모르겠다’고 한마디 할지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건 ‘내 인생에 많은 사랑이 있었다’라는, 가장 솔직한 말입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