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춘선] 연구없는 원조는 실패한다
입력 2012-08-15 18:41
얼마 전 50여개 아프리카 국가 정상급 대표들이 중국을 방문해 협력포럼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중국 후진타오 주석은 200억 달러라는 대규모 경협자금 제공을 약속하는 등 적극적인 협력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대표자격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마 대통령은 “과거 식민지 종주국인 유럽 국가들의 경험에서 보듯 중국과의 통상 관계가 불균형적이고 지속가능하지 못해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비록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중국은 아프리카의 발전보다 석유 등 자원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내정간섭도 하고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래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공산당 독재를 유지하고 있다.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국제무대에서 제3세계 국가들의 정체성이 흐려졌으나 그들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중국은 이들의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간과한 것이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중국을 돈으로 자원을 착취하는 나라, 정치적 민주화나 사회발전 차원에서 배울 점이 없는 나라로 생각한 듯하다.
얼마 전 우리 대통령이 중남미를 순방하고 국무총리도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제3세계 국가에 대해 우리도 중국 같은 어리석은 기여(?)를 하지 않았는지 염려된다. 아프리카 신생국 남수단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할 계획이고, 녹색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발전 경험을 개발도상국에 전수할 계획이다. 이처럼 제3세계 국가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원조위원회에 가입한 뒤 원조액을 늘려 무상원조만 5000억원 수준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나 역할을 봐서는 아직 미흡하다. 그러나 중국 같은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지속적이고 철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물질적 원조 외에도 장래를 위해 필요한 정신적 원조, 즉 경제성장과 사회제도 개선을 위한 우리의 발전 경험이다. 다시 말하면 ‘고기보다 고기 잡는 방법’이다.
국책연구기관이나 대학 부설 연구소는 미국 중국 일본 등에 대해서는 중복되는 연구를 경쟁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후진국을 연구하는 기관은 찾기 힘들다. 있다 하더라도 예산과 관심 부족으로 제대로 활동을 못하는 실정이다. 후진국 연구는 경제수치나 통계자료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점이 많다. 따라서 현지 경험이 있는 별도의 전문가 양성이 필요하다. 한반도라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산업발전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려면 통일 후에도 세계 모든 지역을 상대해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
따라서 일정한 범위와 수준으로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후진국 연구는 수익성 등이 낮아 민간단체나 대학보다는 정부예산이 지속적으로 투입되는 국책연구기관이 수행하는 것이 적합하다.
이제 후진국에 대한 원조기관을 단일화하고 규모도 우리의 국제적 위상에 맞춰 확대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원조대상인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 유럽 선진국이나 중국이 줄 수 없는 우리만의 자산인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경험’을 전수해 돈으로 자원을 착취한다는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켜야 한다.
후진국 원조의 외교적 성과를 제고하려면 부족하지만 우리 무상원조의 1%만이라도 제3세계 연구기관에 투입하고, 젊은 외교관 등 공무원을 초청해 우리의 발전 경험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것도 대책이 될 수 있다.
이춘선 한국외교협회 정책위원·전 스페인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