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 한비야 “2년 6개월 만에 구호현장으로… 가슴 벅차”

입력 2012-08-15 20:13


2011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CERF)이 된 ‘바람의 딸’ 한비야(53)씨가 지난 11일 다시 남수단 봉사활동 현장으로 떠났다. 현장을 떠난 지 2년 6개월 만이다. 그가 떠나기 전 봉사활동을 재개하는 심정 등 그간의 활동에 대해 들어 보았다.

‘인생의 환승역’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한비야씨는 “정말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면 그것을 할 용기가 납니다. 자기가 선택한 그 일을 위해 자신이 지닌 100%를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될 때 결단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9년, 9년간 활동해온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을 내려놓고 미국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날 당시에 그의 심정이 그랬다.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긴급구호 현장’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단지 현장을 바탕으로 한 이론, 이론을 바탕으로 한 좋은 정책을 만드는 과정을 배우고 싶었다. 긴급구호 9년간의 경험은 그에게 구슬이 되어주었다. 구슬을 어떻게 꿰는지를 학교에서 배웠다.

“교수들은 현장에서 배운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이론을 만들어 정책을 제안했습니다. 그런 정책이 채택돼 현장에 적용될 땐 전율을 느꼈어요. 하루 13시간씩 공부했고 밤을 새우는 건 다반사였지만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때 배운 것을 발판으로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국제구호와 개발협력을 가르칠 수 있었죠.”

그는 ‘인도적 지원’에 관한 석사학위를 받은 후 2011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이 됐다. 연간 6600억원의 중앙긴급대응기금이 어떤 긴급구호 현장에 보내는 것이 효과적인가를 자문하는 역할이다. 임기는 3년이다. 그동안 뉴욕과 제네바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그가 예전엔 모금과 홍보를 했다면 지금은 교육과 자문을 한다. 국내 교육은 세계시민학교 교장으로 해외 교육은 국제구호요원자격증(IDHA) 과정의 강사로 활동한다. 4년 전 그 과정의 학생이었던 그는 지난해 10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IDHA 과정의 정식 강사가 됐다.

◇국제구호의 종합판 남수단=“이렇게 뭔가를 손꼽아 기다리는 기분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현장에 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려요. 그곳에 가면 텐트에서 생활하고, 말라리아가 창궐하지만 하루 빨리 가고 싶어요. 텐트 속에 뱀이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독사는 아니래요. 물지 않아서 괜찮아요.”

남수단으로 출국하기 사흘 전에 만난 그는 마치 소풍 날짜를 꼽는 어린아이 같았다. 남수단으로 가는 그의 공식 직함은 ‘인도주의 현장 전문가’. 그는 남수단 톤즈 와랍주월드비전 사업장에서 현장 전문가로 활동하고 유엔과 코이카의 자문위원 역할도 겸한다. 그에게 “왜 남수단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곳은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이고 할 일이 많은 곳으로 국제구호의 종합판이라고 말했다. 또 남수단은 신생 독립국으로 정부가 불안정하고 가뭄과 부족 간 분쟁 등 인재와 천재가 복합적으로 내재하는 곳으로 긴급구호 요원이라면 누구든지 가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 했다.

또 그는 공여국 정부와 국제기구, NGO 간 업무 조정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국가와 국제기구가 구호 활동의 동맥과 정맥이라면 NGO는 실핏줄입니다. 그들 간의 업무 조정이 잘 돼야만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전엔 NGO란 하나의 눈으로 현장을 보았다면 이젠 NGO· 유엔·정부의 눈으로 현장을 바라볼 것입니다. 또 사업이 목적대로 잘 이행됐는지 판단하고 새로운 사업을 개발할 것입니다.”

◇백두대간 종주, 그 영성의 시간= 말도 빠르고 걸음걸이도 빠른 그이지만 ‘한 걸음의 철학’을 갖고 있다. “낙수가 바위를 뚫는다고 하잖아요. 매일 무엇인가 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어요. 안될 것 같지만 일단 한 걸음씩 꾸준히 가다보면 어느덧 목적지에 와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0년 9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 틈날 때마다 하루 10∼12시간씩 산에 올랐다. 산에서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기도의 시간이고, 묵상의 시간이었다. 산행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데이트 시간이었다. 그는 말씀을 묵상하고 신앙고백을 했다.

특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님께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컴퓨터는 코드를 뽑으면 쇳덩이에 불과하고 빛나는 보름달도 태양열이 없으면 하늘에 떠있는 돌덩이에 불과하듯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쇳덩이에 불과해요. 하나님과 딱 붙어 있어야 해요.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지리산 덕유산 속리산 태백산 설악산에 이르는 2년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얼마 전에 마쳤다.

◇한국인은 성숙한 세계시민=그의 베스트셀러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의 키워드는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였다면 다음 책의 키워드는 ‘세계시민’이 될 것 같다. 그는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를 보면 한국국민이라서 자랑스럽다’란 말이 회자되게 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국제회의에서 만난 외국인들은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좋아해요.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도약한 대한민국의 다이내믹한 성장은 엄청난 호소력을 갖습니다. 전쟁이라는 재난과 그 이후의 지독한 가난, 혹독한 군사독재를 극복해낸 한국이 세계시민이 된 것은 멋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장·정책·학계를 아우르는 경험으로 구호와 개발협력에 있어 선구자로 기록될 그가 지치지 않고 국제구호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일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 깊이 이 일을 하고 싶었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한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돕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충고가 가슴에 남는다.

“사실 저는 대학도 제때 가지 못했고, 서른이 넘어서까지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남들과 똑같이 생각했다면 이렇게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개화기를 찾고 스스로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일을 찾길 바랍니다.”

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