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경아] 밤송이 같은 나의 꿈

입력 2012-08-14 19:25


지난 6월 20일 밤꽃이 피었다가 질 무렵 나는 이 지면에 글을 썼었다. 내 사무실 책상 옆, 창가에 피어난 밤꽃이 마지막 향기를 뿜어내고 있을 때였다. 실타래처럼 늘어진 밤꽃이 곤충을 부르며 향기를 진동시켰는데도 그거 한 번 바라볼 짬이 없었던 내가 불쌍했다. 밤꽃 사진을 찍으며 암술과 수술을 찾던 그때가 두 달 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지금 한 번 더 나는 그 밤나무 앞에 섰다.

그때 개울가 옆 밤나무는 잎이 참 여렸다. 막 싹을 낸 잎들이 몰랑거리는 치즈처럼 부드럽고 연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지금의 밤나무 잎은 두꺼워지고 초록이 더 짙어졌고 번들거리기도 한다. 올여름이 얼마나 더웠나. 그 더위와 땡볕을 견디기 위해 번들거려 햇볕의 열기를 반사시키고, 가뭄을 이겨야 하니 잎도 두껍고 질겨질 수밖에 없다.

인정하기 싫지만 늙어가는 중이다. 아무리 값비싼 영양크림을 발라도 마흔 넘어간 여자의 피부가 그러하듯이. 그런데 주름 잡힌 무성한 잎들 사이에서 반짝 눈이 뜨인다. 꽃이 피었던 자리에 초록의 밤송이가 주렁주렁한다. 창문 앞에서 눈을 마주쳤던 밤나무였는데 밤송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 어느 새 크기도 탁구공을 넘어섰다. 참 기특해라. 앞으로 다시 두 달 뒤면 초록의 밤송이가 밤색이 될 테고 그걸 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그런데 문득 돌아서다 마음이 쿵했다.

밤나무는 지난 두 달 동안 저 열매를 맺겠다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두 달 더 토실하고 건강한 밤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그 밤나무와 똑같은 두 달을 보낸 내 시간은 무엇이었나. 단기 기억상실도 아니고 왜 이리 기억이 안 날까 싶다. 분명 열심히 달려왔는데 무엇을 위한 시간이었을까. 내 가슴에 끌어안고 키운 건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바빠도 내 가슴에 이거 하나 곱게 키우고 있다, 저 밤나무의 밤송이 같은 꿈 하나는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그 한 달들이 모여 일 년이다. 그래서 매일 한 번씩 내 꿈을 기억해주지 않으면 한 달을 잊게 되고, 일 년을 잊고, 결국 내가 무엇을 꿈꾸고 사는지도 모른 채 일생을 다 보내버릴지도 모른다. 나의 마흔여섯 번째의 여름이 이제 지나갈 모양이다. 앞으로 나에겐 이 여름이 몇 번이나 다시 찾아오려나. 덥다고 넋 놓고 보낸 이번 여름이 어쩌면 미치도록 아쉬워지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데 괜히 너무 많이 투정을 부렸나보다.

오경아(가든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