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안녕하십니까-(1부) 비상등 켜진 개인의 정신세계] (4) 가장 흔한 정신질환 ‘불안장애’
입력 2012-08-12 19:41
무한경쟁이 부른 ‘현대병’… 100명 중 9명 1번 이상 겪어
#50대 직장인 A씨는 6개월 전 출근길에 갑작스럽게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가슴통증을 느꼈다. 당장 쓰러질 듯 어지러웠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A씨는 응급실로 달려갔다. 검사결과는 멀쩡했다. 잊고 있던 증상은 한 달 뒤 다시 찾아왔다. 이후 같은 증상은 한 달에 한두 차례 이상 반복됐다. 그때마다 A씨는 병원에 갔지만 뚜렷한 병명을 찾을 수 없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20대 여직원 B씨는 하루 종일 발끝만 바라보며 다녔다. 극단적으로 소극적인 B씨는 상사에게 지시를 받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복도를 오갈 때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B씨는 자신의 월급이 입사동기보다 낮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항의를 하려면 사장을 만나야 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애주가인 40대 직장인 C씨는 회식 때 술 따르는 일이 스트레스였다. 직장 상사에게 술을 따를 때마다 손이 떨렸기 때문이다. C씨는 손이 떨리는 자신을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자라고 여길 것 같아 갈수록 위축됐다. 한 번 그런 걱정이 든 이후로는 아예 회식 전에 술을 마시고 갔다. 손은 점점 더 떨렸다.
#70대 할머니 D씨는 집안 식구들이 모두 집에 돌아와야 잠을 잤다. 특히 대학생 손주들이 늦을 때마다 끔찍한 일이 생긴 것만 같아 아예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자주 늦는 가족들 때문에 D씨는 만성적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불안’이다. 불안은 위험을 감지하는 인간의 생존기제이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쳐 사소한 위험에 불안이라는 경보장치가 24시간 울리면 일상생활은 불가능해지고 불안은 불안장애로 발전하게 된다.
A씨는 내과, 가정의학과 등을 전전하다 결국 정신과에서 극도의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지기 싫어하고 성공지향적인 A씨는 직장에서는 승승장구했지만 잦은 음주, 흡연에 업무 스트레스가 겹쳐 결국 반복적인 공황발작을 겪게 된 것이다. 가수 김장훈, 개그맨 이경규, 영화배우 차태현씨 등의 고백으로 ‘연예인병’이란 별칭이 붙은 공황장애는 스트레스, 경쟁, 수면부족, 불규칙한 생활 등 연예인의 생활패턴을 가진 이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B·C씨는 대인관계에서 극도의 불안을 겪는 전형적인 사회공포증(대인공포증)으로, 끊임없이 나쁜 일을 예상하는 D씨도 범불안증 환자로 진단 받았다. 불안장애에는 이외에도 엘리베이터 백화점 등 특정 장소를 두려워하는 광장공포증, 강박사고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강박장애, 개·고양이·피 등 사물이나 상황에 공포를 느끼는 특정공포증 등이 있다.
불안장애는 알코올 및 니코틴 중독을 제외하면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정신질환이다. 보건복지부의 ‘2011년도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 따르면 불안장애의 평생 유병율은 8.7%이다. 100명 중 9명 가까이 평생 한 번 이상 각종 불안장애를 겪는다는 뜻이다. 불안장애로 병원을 찾은 환자도 2001년 26만7888명에서 4년 뒤인 2005년 31만7525명, 2010년 44만5562명을 거쳐 2011년에는 47만5912명(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까지 늘어났다. 10년 만에 두 배 가까이 환자가 늘어난 것이다. 이것도 스스로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은 환자가 이 정도라는 뜻일 뿐, 실제 불안장애 환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안장애는 ‘현대병’이다. 비교할 기록은 없지만 전근대에 불안장애 환자가 많았을 가능성은 낮다. 태어난 동네에서 평생 알고 지내던 가족, 친지, 이웃에 둘러싸여 생을 마친 과거의 사람들과 달리 현대인은 불특정 다수와 무한경쟁을 해야 한다. 불안을 유발할 사회적 인자들이 많아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몇 년 사이 학교, 일자리를 두고 경쟁이 극도로 치열해지면서 한국 사회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도를 넘는 불안을 느끼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말한다.
다행히 불안장애의 치료율은 높은 편이다. 대략 70∼80%의 환자들이 적절한 인지행동치료와 약물치료를 통해 완치가 가능하다. 치료 후 A씨는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했고, B씨는 사장과의 담판으로 월급인상을 얻어냈다. 윤형근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불안이 왜, 어디서 생기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불안해진다. 자신의 불안을 알고 인정하고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불안이라고 판단되면 반드시 의학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