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곽한주] 낙타를 키우는 교육
입력 2012-08-12 18:43
많은 10대들이, 아주 많은 초중고교생들이 공부가 지겹다고들 한다. 공부를 지겨워하는 것은 성적이 앞선 학생이건 뒤진 학생이건 별반 차이가 없다.
공부가 좋으냐고 물으면 열이면 아홉은 “좋아서 공부하는 사람이 어딨어요?”라고 반문한다. 오늘날 우리 교육 생태계에서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은 ‘멸종위기종’이 돼버렸다. 공부에 재미를 느끼는 학생들이 ‘개체수가 감소하여 멸종할 위험이 높은 동식물군’에 속하게 된 셈이다.
대다수 어른들도 자신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공부가 지겹다는 데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본래부터 인간들이 배우는 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어린 아이들을 돌아보라. 서너 살짜리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묻고 배우는 것을 보면, 그림책에 몰두하고 노래와 율동을 따라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본래 배우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동물임을 알 수 있다.
강요하는 공부, 지겨울 수밖에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중학교 문턱에만 가면 공부를 지겨워하는 걸까. 배움을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공부를 원하기도 전에 강요받기 때문이다. 대개 이때쯤이면 부모들이 내 아이를 일류대에 보내고 교사나 의사, 변호사를 시켜야 한다는 강박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학교와 언론, 부모들은 “좋은 대학 못 가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다”고 한목소리를 내면서, 아이들을 종이찰흙마냥 마음대로 빚으려 한다. 엄마가 짜준 시간표에 따라 학원이며 캠프며 뺑뺑이를 도는 게 ‘착한’ 아이가 해야 할 도리가 된다.
그러다 보면 착한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들여 배운 것을 반복하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게 된다. 대학 입시라는 일생일대의 경쟁에서 낙오하는 일이 없도록 똑같은 걸 반복해서 외우고 풀고 정리하는 지겨운 일상을 살게 된다. ‘생활의 달인’들이 비인간적인 무한 반복 작업 덕분에 마치 기계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아이들도 문제풀이의 달인이 되기를 요구받는다. 이런 공부를 하는 데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이 아니라 감수성 예민한 10대 전체를 바쳐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아이들이 거쳐야 하는 이 시기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아이들에게 공부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 된다. 공부하는 시간은 시야를 넓히고 귀를 열고 생각을 다듬는 시간이 아니라 일류대 진학이 가져다준다는 불확실한 과실을 기대하며 견디고 또 견디는 인고(忍苦)의 시간이 된다. 부모도 선생님도 “노는 것은 대학 가서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우리 아이들처럼 소외된 삶을 사는 아이들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싶다.
순응형 인간은 창발성 부족해
이러한 공부, 이러한 교육은 말 잘 듣는 순응형 인간을 양성하는 데 제법 효과적이다. 그러나 창의적 인재를 키우는 데는 젬병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지겨움을 견디며 즐거움을 모른 채 자란 순응형 인간은 건강한 자아를 발달시키지 못하며 행복한 삶을 살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신 내면에 우울과 공허감, 분노를 쌓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지겨운 것을 참으며 사는 사람을 낙타에 비유했다. 등짐을 가득 지고 메마른 사막을 지나는 낙타처럼 부담과 의무에 매여 사는 비주체적 인간을 일컫기 위해서다. 니체는 낙타를 경멸하면서 사자처럼 살라고 했다. 부모든 신이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명령에 따라 사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창발성에 따라 사자처럼 살라고 했다. 지금 우리는 아이들을 낙타로 키우면서 사자처럼 살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곽한주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