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2) 에크하르트 ② 버리고 떠나 있음
입력 2012-08-12 17:58
겸손하라, 그래야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에크하르트의 첫 번째 주제가 하나님이었다면 두 번째 주제는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어떻게 존재를 넘어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겸손’의 언어로 설명한다.
신적인 존재는 겸손한 자요, 겸손한 자는 곧 신적인 존재이다. 겸손한 사람과 하나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래 겸손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겸손의 극치는 성육신에서 나타났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 되실 뿐 아니라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다. 그것은 그가 보이신 최고의 겸손이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이시기 때문에 오직 겸손한 자에게만 알려진다.
겸손은 하나님의 본성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겸손의 길이 곧 ‘버림과 떠나 있음’이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버리고 떠나 있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만물의 전체성과 거룩함을 한꺼번에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버리고 그대로 두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광활한 어둠이자 알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만큼 하나님을 알 뿐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제한된 지성으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찾아지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는 분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기능
우리 영혼에는 몇 가지 기능이 있다. 우선 낮은 기능이 있다. 첫 번째 낮은 기능은 구별하는 능력이다. 이 기능에는 교화라는 금반지가 끼워져야 한다. 둘째 기능은 분노라고 한다. 이 반지에는 평화라는 이름의 금반지가 끼워져야 한다. 셋째 기능은 욕망이라고 부른다. 이 기능에 우리는 자족이라는 반지를 끼워야 한다.
영혼의 고차적인 기능도 있다. 먼저 기억하는 능력이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짝을 이룬다. 둘째 기능은 지성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짝을 이룬다. 셋째 기능은 의지의 기능이다. 성령님과 짝을 이룬다. 이 모든 영혼의 기능이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버린다는 것은 그대로 둔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마음 아닌 분으로, 사람 아닌 분으로, 표상이 아닌 분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무리하게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일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을 살해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비우고, 의도하지 말고, 바라지 말고, 그리고 어떤 것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놓아두는 것,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으로 놓아두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놓아두는 것.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다는 것
가난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외적 가난이다. 외적 가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난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한 종류의 가난이 있다. 내적 가난이다. 우리 주님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라고 말했을 때 뜻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어떤 것도 알지 않고, 어떤 것도 갖지 않은 사람이다.
먼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참회와 외적인 행사에 빠져 있다. 하나님의 가장 사랑스런 의지를 충족시키고자 원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지라고 생각하는 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들이 참되게 가난을 갖기 위해서는, 이전에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그처럼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의지를 모조리 버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도, 진리를 위해서도, 그리고 신을 위해서도 살지 말아야 한다. 가난해지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진리를 위해 살지 않고, 신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방식으로 살아야만 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아는 것에서 아주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정신적으로 가난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피조물에 대해서도,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을 만큼 모든 앎에서 가난하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이 또한 가난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은 지상의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가난한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가난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은 하나님이 작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어떤 자리에 앉지 말고 또 어떤 자리도 갖지 말아야 한다.”
에크하르트에게 가난은 점점 나은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 아는 것에 대한 가난은 의지의 가난보다 더 나아간 것이며, 가짐에 대한 가난은 아는 것에 대한 가난보다도 더 나아간 것이다.
버림은 그대로 둠이다
에크하르트의 ‘버림과 떠남’을 바울의 말로 바꾸면 ‘자기죽음’(갈 2:20, 갈 5:24)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므로’ 우리 지성과 우리의 의지 또한 죽었다고 믿어야 한다.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할 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바깥에 있는 것은 모두 무(無)일 뿐이다.’
버림은 곧 그대로 둠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놓아두는 경험, 신성을 신성으로 놓아두는 경험,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으로 놓아두는 경험,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놓아두는 경험, 사물을 사물로 놓아두는 경험, 하나님을 사물 속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경험, 사물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경험, 안을 그대로 두는 경험, 심지어 자신을 위해서든 진리를 위해서든 하나님을 위해서든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살아야 한다.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이를 위해 우리의 의지를 버려야 한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주여, 당신께서는 먼저 당신의 것이 되지 않은 사람과는 함께하지 않습니다.” 버림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완성하지만 우리도 매일 우리 자신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준비는 우리가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버림은 억압이 아니다. 강압으로 거룩해질 수 없듯이 억압으로 버릴 수 없다. “버림은 지혜와 불타는 사랑이지 억압이 아니다.”
에크하르트의 ‘버림과 그대로 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노력, 지성, 의지의 불필요성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함을 말한다. 사람이 붙잡는 것 중에 가장 마지막이, 하나님을 붙잡는 행위이다. 그런데 심지어 하나님조차 놓아 버리는 철저한 자기포기, 하나님 소유의 자기 애착을 놓아버릴 때 하나님 안에서 부요한 자가 된다는 역설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별세(別世)가 곧 승세(勝世) 아닌가?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