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소송, 소비자의 반격] 乙의 분노 甲이 떤다… 자영업자 홍창빈씨의 항변

입력 2012-08-10 19:03


홍창빈(가명·50)씨는 2004년 10여년 다니던 보험사를 그만뒀다. 사업을 할 참이었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은행에서 2억원 정도 빌렸다. 서울 강남에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잡았다.

사업은 시작부터 잘 안 됐다. 유통업을 하다 인터넷 쇼핑 업체를 차리고 인형과 장식품을 팔았다. 제본소를 겸영했지만 일감이 안 들어와 1년반 만에 접었다. 인형 판매로도 재미를 못 보면서 대출 이자 갚기가 벅찼다. 이자가 낮은 은행으로 갈아탔다. 은행에선 더 많이 빌릴 수 있다며 사업자 대출을 권했다. 그때까진 몰랐다. 은행들이 근저당설정비를 근거 없이 자신에게 떠넘긴 사실을.

“별 다른 설명이 없었어요. 당연히 고객이 부담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죠. 알았다고 해도 약자 입장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거죠. 금융기관이 갑(甲)이잖아요.”

근저당 설정은 은행이 빌려준 돈을 못 받는 때를 대비한 조치다. 은행이 필요로 하는 건데 비용은 10년 넘게 고객 돈으로 때웠다. 지난해 4월 대법원은 근저당설정비를 고객이 낼 이유가 없다고 결론 냈다. 은행 고객들이 들고 일어났다. 근저당설정비 반환을 두고 ‘소송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홍씨는 지난 6월 집단소송에 참여했다. 그가 은행 대신 낸 근저당설정비는 100여만원이다. 이 소송은 한국소비자원과 금융소비자연맹(금소연)이 대리 진행 중이다. 홍씨 같은 참가자는 5만여명. 청구 금액은 500억원, 전체 피해 금액은 10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국내 최대 규모 집단소송이다.

“살면서 처음 해보는 소송이에요. 서류만 제출한 상태라 아직 피부에 와 닿진 않아요. 직접 법원 갈 일은 없으니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네요. 개개인이 진행하기에 버거운 소송을 공동으로 대처하면 상승효과도 있겠죠. 개인이 노출되지 않으니 안심되는 측면도 있고요.”

집단소송을 무기로 ‘소비자의 반격’이 시작됐다. 한데 뭉치면 강해질 수 있다는 걸 체득하자 집단소송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가격 담합, 개인정보 유출, 비행장 소음 등으로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는 요구가 대표적이다. 금소연 관계자는 “최근에는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의혹 관련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고 10일 전했다.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집단소송에 착수할 계획이다.

봇물을 이루는 집단소송은 제도로 보장된 집단소송과는 다르다. 소비자단체나 법무법인이 피해자를 모아 대표로 송사를 치르는 ‘공동소송’이 정확한 표현이다. 소송 참가자는 수수료를 낸다. 홍씨는 건당 3만원씩 12만원을 냈다.

2005년 도입돼 법으로 보장받는 집단소송의 적용 대상은 증권분야뿐이다. 이 제도는 한 명만 승소하면 된다. 동일한 피해를 입은 다른 피해자들은 별도 소송 없이 똑같이 보상받는다. 하지만 7년간 적용 사례는 5건뿐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집단소송제를 모든 분야에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집단소송제가 확대되면 근저당설정비 문제도 한 명만 소송하면 된다. 수만명이 떼 지어 몰려들 필요가 없다. 홍씨는 물론 찬성한다.

“소비자 입장에선 집단소송 범위를 확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지금 공동소송은 장점이 많지만 진행 상황을 상세히 알지 못해요.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죠. 소송에 참여해 놓고 과정을 모르니까. 집단소송이 활성화한다면 기업들이 눈 가리고 아웅 하듯 대응하진 못하겠죠.”

이길 거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글쎄 반반이지 않겠습니까. 100% 확신하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 참여했죠. 소비자는 봉이 아니잖아요.”

고양=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