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소송, 소비자의 반격] ‘싼값소송’ 남발 먹튀 변호사까지… 이길 확률 적고 대부분 군중심리 휩쓸려
입력 2012-08-10 18:43
집단소송은 국가나 대기업의 횡포에 대항하는 소비자들의 단체행동이다. 수천만원을 들여 수십만∼수백만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 어려웠던 소비자들이 비슷한 피해를 입은 ‘동지’를 모아 한판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소비자 주권 회복을 위한 강력한 무기인 셈이다. 그러나 집단소송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먹튀’ 변호사, 집단소송 브로커 등 패악도 생겼다. 전문가들은 집단소송의 효과를 살릴 수 있도록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네이버와 다음 카페에는 집단소송을 준비·진행하기 위해 개설된 모임이 9일 현재 447개나 된다. 최근 개인정보 유출로 문제가 된 KT나 네이트 관련 소송 카페는 33개나 생겼다. 은행권의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으로 CD 금리 연동 대출을 받은 고객들이 낸 집단소송도 잇따르고 있다. 집단소송이 봇물을 이루는 이유는 비슷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돈을 갹출해 저렴한 비용으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하지만 군중심리에 휩쓸려 승소 가능성이 낮은 소송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소송 착수비만 노리는 이른바 ‘먹튀’ 변호사를 양산하거나 새로운 법조 브로커까지 생기는 부작용도 적지 않다.
◇집단소송 왜 성행할까=법무법인 평강이 KT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 집단소송 참가자를 모집한 지 6일 만에 3만명이 몰렸다. 평강이 소송인단 모집을 위해 만든 네이버 카페에는 이미 4만명 이상이 가입했다. 평강의 수임료는 100원. 인지대 2500원을 합하면 개인당 2600원으로 소송에 참여할 수 있다. 소송가액은 1인당 30만∼50만원으로 예상하고 있다. 평강은 수임료 300만원(소송인단 3만명 기준)을 받고 최소 90억∼150억원에 달하는 소송을 준비 중이다. 평강 측은 일체의 착수금이나 성공보수금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평강 측은 “무료 변론을 구상했지만 현행법상 소송 위임인들이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아 직접 제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피해자들에게 100원씩만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집단소송의 가장 큰 매력은 저렴한 소송비용이다. 스타급 변호인단을 구성한 대기업에 법률 지식이 부족한 개인들이 힘을 모아 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막대한 소송비용 때문에 참아왔던 개인들이 서로 힘을 모아 대기업을 상대로 벌이는 반란인 셈이다.
소송을 함께 준비하면서 정보를 교환할 수 있고, 기업들도 소송에 대비해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집단소송으로 손해배상 책임을 입증해 판례가 정립된 경우 유사 소송에서 피해 입증 부담을 줄일 수도 있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재형 교수는 “그동안 대기업들의 횡포를 참아왔던 소비자들이 집단소송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기회가 생겼다”며 “개인들의 소비자 권리가 신장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빛 좋은 개살구=집단소송이 많아지면서 ‘먹튀’ 변호사도 양산되고 있다. 보통 집단소송은 개인당 1만∼3만원의 착수비를 받는다. 소송인단을 1000명만 모집해도 변호사는 1000만∼30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소송가액의 20∼30%에 달하는 성공보수도 있다. 변호사 수가 늘면서 일감이 줄어든 변호사들에겐 군침 도는 조건이다.
그러나 집단소송은 대개 소송 대표인단을 선임한 뒤 소송 일체를 위임하는 방식이다 보니 변호사와 소송 참여자 간 관계가 엉성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변호사가 소송진행 상황을 제대로 알리지 않아 소송인단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사례도 생긴다. 소송비용이 적어 소송이 길어지면 참여자의 관심도 떨어지게 된다. 집단소송 카페에는 ‘변호사가 착수비만 받고 정작 재판 진행에는 소홀히 한다’는 글도 많이 올라와 있다.
소송인단을 모집해 변호사와 거래하는 신종 법조 브로커도 생겼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개인정보 유출 등 사회적 이슈가 된 사건이 발생하면 소송인단 모집 카페를 개설한 뒤 변호사에게 소송을 맡기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해킹 피해자 카페를 사칭한 가짜 카페를 유의하라’는 경고문을 올린 카페도 많다.
네이트 해킹 사건 때는 집단소송 카페 ‘네해카’ 운영자와 변호사 사이에 갈등이 생겨 변호사가 교체되기도 했다. 당시 소송을 맡은 변호사는 “운영자가 ‘뒷돈’을 요구했다”고 주장했고, 운영자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라면 맞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집단소송은 승소율도 좋은 편은 아니다. 최근 5년간 옥션, GS칼텍스, 신세계몰, 현대캐피탈, SK커뮤니케이션즈, 넥슨에서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 집단소송에서 손해배상이 인정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2008년 SK브로드밴드 개인정보 유출 건의 경우 3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승소하긴 했지만 1인당 인정된 배상액은 10만∼20만원에 불과했다.
전웅빈 기자 imung@kmib.co.kr